호사 누리는 ‘추징금’ 미납자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7.2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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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10인 대부분 경제 사범들로 여전히 상류층 생활…본인은 ‘빈털터리’라도 부인·자녀들 재산은 증가

범죄 피고인에게 부과한 천문학적 액수의 추징금이 공중에 붕 떠 있다. 법원에서 거액의 추징금을 선고받고도 “돈이 없다”라며 버티고 있는 미납자들 때문이다. <시사저널>이 최근 입수한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현재 10억원이 넘는 추징금 미납자는 모두 2백1명이다. 액수로는 24조5천1백26억원에 달한다. 서울시의 올해 예산 21조3천억원을 훌쩍 넘어서는 금액이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6월22일 전북 무주리조트 내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도착해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이 중 1천억원 이상 추징금을 내지 않은 미납자는 여섯 명이다. 고액 미납자 상위 10명이 미납한 추징금은 23조8천3백85억원으로 전체의 95%가 넘는다. 그런데도 최근 3년간의 추징금 집행률은 1%도 못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고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은 미납자들은 누구일까. 1위에서 3위까지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임직원 다섯 명이 차지했다. 김 전 회장과 대우 임직원들은 2002년 11월과 2005년 4월에 재산 국외 도피 혐의로 각각 21조2천4백92억원과 1조7천8백65억원을 선고받았다. 전체 추징금 액수는 23조3백58억원이다. 추징금 총액의 90%가 넘지만, 지금까지 추징된 금액은 0.1%도 되지 않는 3억2천여 만원에 불과하다.

김 전 회장의 부실 경영은 국민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정부는 대우그룹을 살리려고 약 30조원이라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41조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저질렀고, 결국 회사가 무너졌다. 이로 인해 30조원의 혈세 대부분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 회수된 공적자금은 투입 자금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약 8조원에 불과하다. 대우그룹의 부도로 인해 수십만 명에 달하는 소액 주주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김 전 회장은 “사업상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만 하고 있다.

재벌이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했다. 현재 김 전 회장의 직계 가족들은 기업의 대주주이거나 최고경영자 자리에 있다. 김 전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씨는 서울 아트선재센터와 경주 아트선재미술관의 관장을 맡고 있으며, 옛 대우개발의 후신인 베스트리드 리미티드의 최대 주주이다. 정씨는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 내 건물 부지를 매입하는 등 자금 동원력을 과시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의 차남인 김선협씨는 경기도 포천의 아도니스 골프장 대표를 맡고 있다.

 

김 전 회장도 여전히 상류층의 삶을 살고 있다. 겉으로만 ‘빈털터리 신세’일 뿐이다. 그는 지난 2008년 1월에 사면받은 후 대우그룹의 전직 임원들과 자주 만나며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김우중 회장의 재기론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김 전 회장은 또 하룻밤 숙박료가 1천100만원 정도인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 23층 팬트하우스를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08년 5월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CDL호텔코리아가 “호텔 23층의 9백3㎡(약 2백73평)짜리 펜트하우스를 비워달라”라며 김 전 회장을 상대로 건물 명도 소송을 내면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은 1999년쯤부터 25년간 장기 임대했고, 임대 금액은 하룻밤에 3백28원이다. 적은 돈을 내고 특급 호텔 팬트하우스를 이용하는 특혜를 누렸던 것이다. 1심에서는 CDL측이 승소했으나, 2심에서는 원고 패소 결정이 내려져 김 전 회장은 팬트하우스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서울 힐튼호텔 홍보팀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지금도 (팬트하우스를) 이용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재판이 (완전히) 끝났는지 우리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이다”라며 더 이상의 말을 피했다. 검찰은 그동안 ‘대우 추징금 특별대책반’을 꾸려 김 전 회장의 고급 미술품, 주식 등의 은닉 재산 일부를 찾아냈으나 추징 실적이 저조해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있다.

추징금 미납 4위는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김종은 전 ㈜신아원 대표이다. 김 전 대표는 수출 금융 명목으로 국내 4개 은행에서 대출받은 1억8천만 달러 중 1억6천만 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1998년 4월 구속되었다.

법원은 이듬해 7월 김씨에게 1천9백64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법원은 또 2006년 7월 최 전 회장에게 추징금 1천5천74억원을 확정 판결하고 김씨의 추징금은 공동 피의자인 최 전 회장과 함께 내도록 했다. 지금까지 최 전 회장과 김씨에게 추징한 금액은 고작 1천100여 만원에 불과하다.

“돈이 없어 추징금을 내지 못한다. 회사를 찾으면 반드시 내겠다”라고 말한 최순영 전 회장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최 전 회장의 수중에는 가진 것이 없지만, 그의 부인 이형자씨는 부자이다. 최 전 회장은 부인 덕분에 호화 주택에서 살며 한껏 부를 누리고 있다. 물론 그가 살고 있는 집도 부인 명의이다. 이씨는 또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고급 빌라(83평)를 소유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시사저널>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 집은 지난 2006년 1월 이형자씨가 한 건설업체로부터 35억원에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씨는 이 돈을 어디서 조달한 것일까. 돈 버는 사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이다. 이씨의 자금 출처가 최 전 회장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 재기설이 나돌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3월22일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출범 43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 필두로 정치인 중에도 고액 미납자 많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추징금 미납 순위 5위이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6월, 서울서부지법의 재산 명시 신청 때 “예금 29만원이 전 재산이다”라고 말해 세간의 비웃음을 샀다. 물론 전 전 대통령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나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처럼 ‘전두환’ 명의로 남아 있는 돈은 없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도 남부럽지 않게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서울 연희동 자택에 살며 수시로 가족이나 측근들과 함께 골프 등을 다니고 있다. 지난 6월22일에는 전북 무주리조트 내 골프장에서 가족·측근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사설 경호원들의 철통 경호를 받는 등 여전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이 수천억 원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이 전씨 가족들의 재산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대형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장남 재국씨는 지난 2005년 3월 경기 연천군 임진강변 일대 임야와 밭 등 1만6천여 평을 자신의 명의로 매입했다. 또 같은 해 3월부터 6월 사이에 부인 정 아무개씨 이름으로 임야와 밭 8필지 7천5백평을 매입했고, 딸 명의로는 6필지 4천5백평을 사들였다. 이곳은 임진강변을 끼고 있는 천혜의 지역으로 최근 몇 년간 땅값이 서너 배가량 폭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남 재용씨는 지난해 중순쯤 시가 30억원대인 이태원의 고급 빌라(100평)를 매입했다. 삼남 재만씨는 서울 한남동에 시가 100억원대의 상가 건물 등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추징당한 것은 2008년 6월이다. 당시 검찰은 전씨의 은행 채권 추심을 통해 4만7천원을 징수했다. 그 사이 한 푼도 징수를 하지 못했고 만약 내년 6월까지 10원이라도 찾아내지 못하면 더 이상 추징이 불가능하게 된다. 추징 소멸 시효가 3년이기 때문이다.

추징금 미납자 6위부터 10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인들이다. 6위는 특가법상 관세법을 위반하고 1천2백80억원의 추징금을 내지 않은 정태철씨이다.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 후 9백65억원을 미납한 사업가 김준식씨가 7위에 올랐다. 8위는 지난 2007년 7월 특가법상 사기 혐의로 기소된 사업가 박석진씨이다. 박씨는 8백75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채 버티기를 하고 있다. 9위는 1996년 12월 금괴를 밀수하다 적발되어 기소된 박치석씨이다. 박씨는 현재 7백57억원의 추징금이 미납된 상태이다. 외국환 거래법 위반으로 기소된 후 추징금 5백19억원을 미납한 김세환씨가 10위이다.

10위권 밖의 유명 인사로는 노태우 전 대통령, 권노갑 민주당 고문, 조영주 전 KTF 사장, 신연식 전 한국예원대 이사장 등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추징금 2천6백29억원을 선고받았고, 지금까지 2천3백44억원을 추징당했다. 2백80억원을 미납한 상태이다.

그런데 얼마 전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씨가 모교인 경북여고에 5천만원을 기부하면서 여론의 눈총을 받았다. 추징금은 내지 않은 상황에서 기부금을 낸 것이 문제였다. 부인 김씨와 아들 재현씨는 또 6월22일 대구 동구의 노 전 대통령 생가 앞에 실물 크기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인 이형자씨가 소유하고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코번하우스. ⓒ시사저널 유장훈

권노갑 민주당 고문도 추징금 고액 미납자 중 한 명이다. 권고문은 지난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2백억원을 받은 혐의로 추징금 1백50억원을 선고받았다. 권고문은 지금까지 3백여 만원만 납부했을 뿐이다. 검찰에서 권고문의 아파트 등을 살펴보았으나 권고문의 명의로 된 재산은 없었다고 한다. 신연식 전 한국예원대 이사장과 조영주 전 KTF 사장은 각각 13억원과 24억원을 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추징금 징수율이 떨어지는 이유는 법의 허점 때문이다. 현행법상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형사 처벌 대상이 아니다. 추징금 미납자들은 이런 법의 허점을 십분 이용하고 있으며,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재산을 은닉하거나 빼돌리는 방법으로 추징금 납부를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즉, 가족이나 타인 등의 차명으로 재산을 은닉할 경우 추징할 방법이 없다.

10억원 이상의 고액 미납자들 대다수는 정부 고위층을 지냈거나 전직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다. 이들은 ‘개인 재산’은 없으나 여전히 ‘호화 생활’을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추징금 제도의 문제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추징금 제도를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無權有罪)’에 비유하기도 한다. 권력층에 유리하게 만들어진 제도라는 것이다.

검찰은 대검 중수부 첨단범죄수사과에 ‘자금 세탁 수사 및 범죄 수익 환수 전담반’을 설치하고 추징금 징수에 나서고 있지만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검찰은 추징금 징수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납부를 고의적으로 회피하는 경우 벌금과 노역장 유치 등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며 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현행법을 고쳐 형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에 법조계도 동의하고 있다.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는 “지금의 솜방망이식 추징금 징수로는 대책이 없다. 외국의 사례를 참조해서 벌금형 전환이나 노역장 유치 등 납부를 강제할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금의 추징금 제도에서는 검찰이 ‘뛰는 놈’이면 미납자들은 ‘나는 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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