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도관 양심이 시대를 깨웠다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0.08.1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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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교도관 황용희씨, <가시울타리의 증언> 펴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비화 등 생생히 증언

1980년 서울의 봄 시절부터 현재까지 영등포교도소에서 30년간 근무하고 있는 현직 교도관 황용희씨(53)가 현대사의 귀한 자료가 될 사실들을 증언했다. 황씨는 최근 펴낸 <가시울타리의 증언>(멘토프레스)이라는 책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의 전말과 ‘고문 경관’으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씨의 행태 등을 실감나게 증언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했다.

 

▲ 지난 1989년 1월14일 명동성당에서 고 박종철군 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박종철군의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연합뉴스

■ 박종철 고문 치사 은폐 조작 사건의 전말

1987년 1월20일, 고문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가 구속되어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방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관들이 동료를 면회하러 왔다. 그들은 치안본부에서 모종의 메시지를 듣고 온 사자들이다. 상부에서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들씌워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그들은 분노와 번민으로 날을 지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주위 사람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바로 옆방에서 이 말을 전해들은 이부영이 기자 정신(이 전 의원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을 발휘해 경관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부영은 이름 석 자만으로도 골수 운동권 인사라고 각인되어 있던 터라 노회한 대공수사단 요원들이 순순히 이부영에게 사건 전모를 털어놓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하늘은 끝까지 정의를 버리지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안유 계장이 그를 믿고 돕기로 작정한 것 아니겠는가. 거짓 가면에 가려 있던 진실의 거대한 추가 정의를 향해 움직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남영동 대공수사단 박처원 단장과 일행이 2억원이 든 입금 통장을 조·강 두 사람에게 제시하면서 가족들의 생활은 염려 말라고 회유하고, 만약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가족들의 생활이 어려워짐은 물론 두 사람 역시 밖에 나와도 살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협박하는 면담이 있었다. 특히 그들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던 날, 반목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고문 경찰관들과 정권측의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안유는 자연스럽게 고문자 전원의 신상을 파악하게 되었다.

엄청난 얘기를 들은 그는 이부영과 상담하는 중에 넌지시 운을 떼었다. 안유의 공분과 양심이 없었던들 ‘박종철군 고문 치사 은폐 조작 사건’이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부영은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몇 차례 편지를 써 한재동의 손에 쥐어주었다.

문건을 받아든 한씨는 이것을 전병용에게 건넸으며 전씨는 즉시 민주 진영의 맏형으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던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문건을 받아든 우촌(김정남의 아호)은 이 사실을 함세웅 신부를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알렸다.

이부영을 비롯해 안유, 한재동, 전병용, 김정남, 함세웅. 이 여섯 사람 손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은폐 조작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것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일으키는 촉매제로 작용해 급기야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고문의 달인’ 이근안의 실체

1988년 12월24일에 잠적한 이근안은 10년10개월 후인 1999년 10월28일 스스로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했다. 이씨가 자수한 후, 그의 도피를 지시하고 비호한 세력이 경찰 간부였음이 드러났고, 김근태 고문 사건을 비롯해 5·6 공화국 시절 자행된 각종 인권 유린의 실태가 밝혀졌다. 이씨는 고문 혐의를 받아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을 대공 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이었다. 관절 뽑기와 볼펜 심문에 이르기까지 각종 고문에도 통달해 있어 다른 기관에 고문 출장을 다닐 정도였다. 그는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혐의로 1988년 12월24일부터 수배를 받아왔다.

이씨는 2000년 10월19일 고척호텔(영등포교도소)에 나타났다. 도피 후 뉴스에서 많이 보아온 터라 ‘주목할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를 대면하자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첫인상은 수더분했다. 형사처럼 눈매가 날카롭지도 않고 거만하게 콧날이 오뚝 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맘씨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무자비하거나 앙칼진 면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무난한 얼굴에 떡 벌어진 어깨와 곧추선 허리선이 예사 무지렁이는 아닌 듯이 보였고 솥뚜껑만 한 손이 그가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구속되어 중형에 처해진 것에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또한 은연중에 반동 회귀를 꿈꾸고 있었다. 어둠의 시대가 다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감옥에서 만난 전경환과 염보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이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온 것은 1989년 6월21일 정오 무렵이었다. 육척 거구에 머리는 훌러덩 벗겨졌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하체가 튼실해 혈기 왕성한 장정에 비길 바 아니었다. 그가 오기 하루 전, 직원들은 특별 교육을 받았다. 근무자 외에는 원예작업장에 접근하지 말 것이며, 혹여 다른 재소자가 그 집 동생을 해코지할 우려가 있으므로 계호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것이다.

전(경환)씨는 정식으로 원예에 취직하고 고척동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원예에 출역해 반가운 손을 만났는데, 바로 치안본부장과 서울시장을 지낸 염보현이다. 두 사람은 양손을 부여잡고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고, 둘 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연합뉴스
▶ 수감되었을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

내가 수감되어 있던 곳은 영등포교도소 안에 여자 수감자들을 가둬놓는, 벽 안에 벽을 또 쳐놓은 곳이었다. 고문 경찰관들도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내가 있던 곳에 수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박종철군을 고문하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조한경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그런지 밤새도록 찬송가를 부르고, 강진규는 밤새도록 울었다. 그 사람들은 전부 사람을 잡아서 감옥에 보내는 사람들이었는데, 자신들이 감옥에 들어왔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나. 

▶ 박종철 고문 치사 은폐 조작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당시 보안계장이었던 안계장을 통해 고문 경찰관들의 상사들이 면회 와서 하는 얘기, 그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얘기를 직접 들었고, 그 과정에서 고문 조작이 은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계장은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서 어떻게 되겠나’ 하는 마음에 친분이 있던 나에게 한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 안유 보안계장이 용기를 내기까지의 과정은?

이제는 역사적 사실을 옳게 기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득을 시작했다. 안계장은 자신이 살아온 이력이 있고, 현재 퇴직 공직자로서의 모임이 있으니 그 안에서 굉장히 곤혹스러운 위치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설득했다. 공무원이라고 정의감도 없고 공분도 없는 것인가. 안계장은 공무원이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바라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현재 책을 낸 황용희 교도관도 조사를 받고 있다. 황교도관도, 안계장도 지금은 어렵겠지만 극복해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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