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의 통로’ 구실 하며 커피 향 진하게 밴 자리
  • 글·사진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10.1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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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울에 하나 둘 생겨났던 서양인 호텔의 역사

서울 정동의 덕수궁 안쪽에는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이름의 해묵은 서양식 건축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건물 앞쪽에 소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예전에 이곳은 전망이 탁 트인 공간이었다. 길게 빼어낸 차양막 지붕 아래 목조 기둥과 철제 난간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으로 늘어선 돌기둥과 전체의 외양이 누군가의 휴식처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내력을 설명하는 글에는 대한 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다과 등 휴게 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구절이 빠짐없이 주어진다. 심지어 아관 파천 때 처음 커피에 맛을 들인 고종 황제가 이곳에서 자주 커피를 찾았던 일종의 카페였다는 내용을 담은 안내 책자도 없지 않다.

▲ 덕수궁 정관헌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은 그다지 근거가 없거나 후대에 만들어진 매우 과장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정관헌에 관한 문헌 자료를 찾아보면, 그 어디에도 이곳이 휴식 공간이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순종실록부록> 1912년 7월2일자에는 ‘태왕전하(太王殿下; 고종)가 정관헌에 임어하여 어진을 중화전으로 이봉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주로 어진(御眞; 황제의 초상)과 예진(睿眞; 황태자의 초상)을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종 황제가 아관 파천 때 처음 커피 맛을 보았다는 얘기도 사실과는 크게 다른 부분이다.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가 지은 <조선풍물지>에 따르면, 1883년 11월에 그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해관 총세무사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얻어 마신 내용이 등장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아관파천 훨씬 이전부터 이미 고종 황제는 커피 맛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전래된 시절의 얘기를 할 때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이다. 흔히 ‘미스 손탁(孫澤孃)’으로 알려진 그는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으로, 1885년 조선에 부임하던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따라 처음 서울에 들어왔다고 알려진다. <윤치호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웨베르 공사 처남의 처형’이 되는 관계였다.

손탁은 독어, 프랑스어, 영어에다 우리말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탁월한 언어 감각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서양식 요리와 실내장식 등의 일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자연히 손탁의 손을 거쳐 국왕과 왕비에게 소개된 서양식 관습과 풍물도 적지 않았고, 이같은 배경으로 그가 서울 외교가의 중심 인물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의 집은 반일·친미 세력의 대명사인 ‘정동구락부’의 회합소가 되기도 했다.

아관 파천이 있던 1896년에는 러시아 공사관 건너편에 있던 ‘정동 29번지’의 땅을 사들였는데, 이곳이 곧 ‘손탁호텔’이 들어서는 자리이다. ‘손탁빈관(孫澤賓館)’ 또는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호텔은 1902년에 신축되어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Private Hotel: 예약된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 호텔)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 당시 이곳의 위층은 귀빈실 용도로 사용되었고, 아래층은 일반 객실과 식당, 손탁 자신의 거주 공간 등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 근대 개화기 서울에 있었던 서양인 호텔의 여러 모습들. 왼쪽부터 손탁호텔, 프랑스호텔(팔레호텔), 정거장호텔, 애스터 하우스이다.

 

비운의 역사 간직한 현장도 여럿

원래 손탁의 집은 한창 때 서울 거주 서양인들의 일상 공간처럼 자리매김되었으나, 1904년 러일 전쟁을 고비로 러시아 세력이 크게 위축되면서 호텔은 그럭저럭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 와중에 이곳은 특히 1905년 당시 일본의 특파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머무르며 이른바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듯 주요한 정치 인물의 회합소나 외국인 탐방객의 숙소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손탁호텔은 결국 1909년에 이르러 다른 서양인 호텔이었던 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행로를 걸었다. 순종 황제는 귀국길에 오른 손탁 여사에게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해 은으로 만든 술잔과 상당한 금품을 하사했다.

그 이후 ‘손탁이 없는 손탁호텔’은 경영난 탓인지 1917년에 건물 부지가 이화학당에 넘겨져 여학생 기숙사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1922년 그 자리에 프라이홀의 신축을 위해 헐리면서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이 자리에는 2004년에 준공된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런데 흔히 손탁호텔은 지명도가 워낙 높은 탓인지 으레 서울에 들어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고 치부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 서울 시내에 서양인에 의한 근대식 숙박 시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 직후인 1900년 전후이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디 인디펜던트> 1898년 1월4일자에 수록된 ‘서울호텔’ 광고 문안은 그 이전에 이미 서양식 호텔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만, 이 호텔의 주인은 이탈리아인 삐이노(F. Bijno)이고, 그 장소가 ‘황궁 구내’, 즉 ‘덕수궁 지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이 호텔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고증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것 말고도 손탁호텔보다 개업 시기가 약간 빠른 것으로 덕수궁 대한문 바로 앞에 자리했던 ‘프랑스호텔’과 ‘임페리얼호텔’이 있었다. 이 가운데 프랑스호텔은 궁궐 바로 앞에 있다 하여 ‘팔레호텔(Hotel du Palais)’이라고도 했는데, 1901년에 우리 나라를 찾은 미국인 사진여행가 버튼 홈즈의 기록을 비롯해 여러 서양인의 여행기를 통해 이 호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대문 밖(충정로 1가 75-5번지, 현 농협중앙회 후면)에 있었던 ‘스테이션호텔(정거장 호텔)’의 존재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면서 1901년 4월 서대문역 바로 앞에 개업한 이 호텔은 영국인 엠벌리가 운영했던 것으로, 1905년에는 원래 ‘팔레호텔’을 운영했던 프랑스인 마르텡에게 인수되면서 그 이름도 ‘애스터 하우스(Astor House)’로 변경되었다. 이곳은 마르텡의 한자 이름을 따서 ‘마전여관(馬田旅館)’으로도 알려졌는데, 1907년 이후 단순한 숙박 시설에만 그치질 않고 활동 사진 연극장으로도 널리 이름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이곳 ‘애스터 하우스’는 대한매일신보 사장이었던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Ernest Bethell, 裵說, 1872~1909)이 일제의 탄압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로도 기억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때로 우리가 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을 단순히 커피나 사교 문화와 같은 근대 서양 문물이 퍼져나가는 진원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까닭은 바로 이러한 대목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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