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지 않는 중·일 조어도 분쟁
  • 소준섭│국제관계학 박사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1.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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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해역에 엄청난 양의 지하자원 매장 추정…중국, 오키나와 영유권까지 주장 나설 조짐

일본과 중국 간에 조어도(釣魚島: 중국 명칭 댜오위다오, 일본 명칭 센카쿠 열도) 분쟁이 식지 않고 있다. 마조욱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0월12일 일본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최근 조어도에 대해 ‘공중 시찰’을 진행한 것과 관련해 “중국 영토 주권에 대해 손상을 주고 중·일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이다”라고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수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반일·반중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EPA

조어도는 타이완 지룽(基隆) 시로부터 1백86km 떨어져 있고 중국 대륙 저장 성 원저우(溫州) 시로부터는 3백56km 떨어져 있으며, 일본 오키나와 섬으로부터는 4백17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총 면적이 6.3㎢에 불과한 무인도이다.

조어도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된 것은 명나라 영락제 원년(1403년)의 <순풍상송(順風相送)>이라는 문헌으로서, 이후 중국에서는 계속해서 이 섬을 조어도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는 1786년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의 ‘유구국전도(琉球國全圖)’에 조어도가 나타나 있다. 그로부터 98년 뒤인 1884년 일본인 고하진사랑(古賀辰四郞)이 이 섬을 발견했다면서 일본 외무성에 일본 국계로 편입해달라고 신청했다.

한편 1884년 영국 해군이 이 섬을 조사한 뒤 섬의 이름을 ‘Pinnacle Islands Group’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1900년 일본의 한 교사가 이 섬에 도착해 이 섬의 이름을 영문명인 ‘Pinnacle’이라는 명칭에 근거해 ‘첨각열도(尖閣列島: 센카쿠 열도)’라고 붙였다. 그러다가 1950년에 일본 외교부가 ‘일본 외교문서’에 처음으로 이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일본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기 세 달 전인 1895년 1월14일 일본은 내각회의를 거쳐 조어도를 ‘주인이 없는 땅, 즉 무주지(無主地)’라고 부르면서 조어도를 오키나와 현 이시가키 시에 편입시켰다.

1969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는 조어도 부근 해역에 대규모의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조어도 일대의 영해는 일약 황금 지대로 변모해 분쟁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최근 일본측에서 이 해역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서고 있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곳에 매장된 천연자원은 엄청난 규모로서 일본이 향후 3백2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망간을 비롯해 1천3백년 사용할 코발트, 100년 동안 사용할 니켈, 100년 동안 사용할 천연가스와 기타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본토에서 석유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은 자원 빈국 일본으로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생명선인 것이다.

1970년 2차 대전 이후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던 미국은 오키나와 및 조어도를 일본에 반환하기로 결정했고, 중국과 타이완은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1972년 5월15일 중국측의 반대에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조어도의 행정관할권 역시 일본에 넘겼다. 다만 미국은 조어도의 최종적인 주권 문제에서 중립 입장을 견지할 것임을 표명했고, 이 입장은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1971년 1월, 2천5백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 조어도 보호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조어도 보호 운동(保釣運動) 흐름이 시작되었다. 1972년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되고 1978년 중·일 우호조약에 양측이 서명할 때 양측은 조어도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는 태도를 취했다. 1979년 5월 일본 순시선이 조어도에 착륙해 헬리콥터 이륙장 건설을 시도했는데, 중국에서 2백여 척의 선박이 부근 해역으로 몰려와 중국 주권을 선언하며 시위하자 일본측은 이 계획을 포기했다. 이때부터 조어도 주권 문제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타이완 외교 관계에서 핵심적인 초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90년 9월29일 일본 해상방위청이 일본 우익 단체가 설치한 등대를 항선 표지로 정식 선포하자 다시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어도 보호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1992년 2월25일 중국 전국인대(全國人代)도 ‘중국의 영해 및 접속 수역에 관한 법(약칭 영해법)’을 제정해 정식으로 조어도를 중국 영해 범위에 포함시켰다. 

이후 1996년 7월 일본 극우 단체인 일본청년사가 조어도에 상륙해 등대를 설치했다. 그러자 홍콩에서 1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조어도 보호 운동이 펼쳐졌고,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도 병행되었다. 이어서 이해 10월에는 홍콩, 마카오, 타이완의 민간인들이 조어도에 상륙해 중국의 오성홍기(五星紅旗)나 타이완 국기를 흔들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동아시아 패권 향방 가름할 전략적 요충지

▲ 지난 9월14일 조어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순시선들이 타이완 어선을 추격하고 있다. ⓒAP연합

2004년 3월24일에는 일본 정부가 이 조어도에 상륙한 일곱 명의 중국인을 체포한 일이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타이완 총통 마잉주도 바로 미국에 유학하던 청년 시절부터 이 조어도 보호 운동의 젊은 지도자로 활동했고, 그의 정치적 성공은 조어도 보호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명성에 힘입은 바 컸다.

최근에는 중국측이 오키나와의 영유권까지 주장하고 나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비록 아직은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로 발전되지 않았지만, 이미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오키나와 반환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왕국(琉球王國)으로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09년 일본 가고시마의 사쓰마국이 침공해 정복함으로써 이후 류큐 왕국은 사쓰마국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되지만,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 토쿠가와 막부 양쪽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인 1872년, 일본은 최종적으로 류큐 왕국을 식민지로 병합했다. 당시 청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 영토로 완전 편입되었던 것이다.

향후 조어도에 대한 자신들의 영유권을 되찾기 위한 중국의 거침없는 공세와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 간의 신경전과 충돌이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리고 이는 동아시아 정세, 나아가 세계적 범주에서의 패권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특히 대대적인 해군력의 증강을 통해 ‘대양 해군’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중국 해군에 조어도 분쟁은 그 활동 반경을 대폭적으로 넓힐 수 있는 절호의 전략적인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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