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은 이토 히로부미,기모노 입은 친일 귀족 부인
  •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1.1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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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통감 시절, ‘을사오적’ 이지용 등과 나란히 사진 촬영

여기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색다른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06년 이후 한국통감으로 재임하면서 유달리 ‘선린’이니 ‘우호’니 하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앞세웠던 그였다. 그러한 탓일까, 사진 속에 보이는 그는 갓을 쓴 한복 차림으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행색이다.

그가 과연 이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단서는 우선 매일신보 1915년 1월1일자에 수록된 ‘일본복의 조선 부인과 조선복의 일본 부인’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사진 자료에 숨어 있다.

여기에는 “조선옷을 입고 뒤로 오른편에 선 부인은 공작 이토 히로부미 씨의 미망인 우메코(梅子)요, 왼편은 이토 공작의 딸인 스에마츠(末松) 자작의 부인 노리코(德子)요, 앞으로 일본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은 부인은 이지용씨 부인 이옥경(李鈺卿)이요, 왼편은 박의병씨 부인 박주경(朴洲卿)이라. 이 사진은 지난 명치 39년(1906년) 11월 이지용씨가 특파대사로 동경 갔을 때에 이토, 스에마츠 두 부인에게 조선 의복을 선사한 답례로 두 부인이 이·박 두 부인에게 일본 의복을 선사한 기념 사진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자는 한복 차림의 이토 사진에 등장하는 그들과 완전히 동일인이다. 그들의 면면과 옷차림에 비추어보면, 두 장의 사진은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 한복 차림의 이토 히로부미와 특파대사 이지용 일행의 모습이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9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도쿄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등장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왼쪽부터 특파대사의 수행원이던 한성부 판윤 박의병(朴義秉, 1853~1929) 내외이고, 가운데가 이토 통감 내외, 오른쪽이 특파대사 이지용 내외 그리고 앞쪽 맨 오른쪽이 이토의 딸이다.

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일본으로 특파대사를 보낸 까닭에 대해서는 황현의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다. 대개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머물러 있기를 청원하는 일과 일본으로 피신한 이준용과 박영효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지용의 처 홍씨는 이름을 고쳐 이홍경으로 일컫고 함께 일본으로 갔다.”

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 스스로의 강청을 못 이겨 한국통감으로 유임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고종 황제의 친서를 들고 일본특사로 파견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한 차례 이토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고종 황제와는 5촌지간이다.

하지만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 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더불어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서명·체결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 토지를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로써 그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 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에 앞장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이지용·박의병, 끝내는 노름으로 패가망신

▲ 매일신보 1915년 1월1일자에 수록된 사진 자료이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박의병의 부인, 이토의 딸, 이토의 부인, 이지용의 부인이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그런데 그의 친일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일찍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21일자에 수록된 관련 기사를 통해 잘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중추원 고문 이지용씨가 근일에 용산강정에서 박의병, 김승규 씨를 청하여 화투판을 크게 설시하였다더라’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기사에는 ‘박의병씨가 이지용씨의 용산강정에서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말은 작보에 게재하였거니와 또 들은즉 판돈이 수천여 원이나 되는데 박씨는 1천여 원을 잃은지라 집문서를 전당잡혀 빚을 얻으려고 극력 운동하는 중이라더라’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보아하니, 여기에 나오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이라는 인물은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었던 그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그는 1908년 일본 해군이 진해만을 군용지로 수용하는 일에서 사무 처리를 맡았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화투판을 전전하다 가산을 탕진할 위기에 처한 것은 박의병 뿐만 아니라 이지용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주 화투판을 벌이곤 했던 용산강정(龍山江亭; 원래 브라운 총세무사의 별장)을 노름빚에 쪼들려 결국 처분해야 했고, 1910년에는 화투판을 급습한 일본 헌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얼굴을 다치는 한편 그들에게 붙들려 “다시는 잡기에 손대지 않겠다”라고 사죄까지 하는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노름병 앞에는 이러한 다짐조차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내 다시 화투판을 전전했고, 그러다가 1912년 정초에는 다른 친일 권세가들과 어울려 ‘짓고땡’ 판을 벌이다 순사에게 발각되어 큰 사단이 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공판에 회부되어 태(笞; 매질) 100대의 판결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수여받은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 사이에 그는 친일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는데, 동아일보 1920년 6월18일자에 수록된 기사는 패가망신에 가까운 그의 형편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가산이 탕패되고 생계가 곤궁함으로써 능히 백작이라 하는 영위를 보존키 어려울 뿐 아니라 도저히 귀족의 체면을 유지키가 어렵겠다 하는 이유로 백작 이지용씨가 작(爵)을 내놓겠다는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는 소문이 낭자한데… 이씨는 협착한 두 칸 사랑방에 속절없이 들어앉아 금년 여덟 살 된 손녀따님이나 무릎 위에 앉히고 소일로 삼을 뿐이니 나날이 쇠잔하여 가기만 하는 가세는 마침내 불과 육십 원씩의 사글세조차 내기에 눈살을 찌푸릴 곤경에 떨어진 형편이라.’

 그런데 매일신보 1927년 4월24일자에 보면 이지용의 실제(實弟)라는 이범구(李範九)의 행적에 관한 내용이 하나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기사의 제목은 ‘이백작의 실제, 아편 빨다 피착, 구한국 시대의 궁내차관, 지금은 아편쟁이의 신세’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어떠한 세상의 배부른 고민이 이들 형제를 도박과 마약에 빠져들게 만든 것일까? 노름에 빠져든 친일 귀족의 말로는 ‘사필귀정(事必歸正)’, 이 한마디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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