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반목의 정치, ‘총격’ 맞다
  • 한명택│워싱턴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1.01.1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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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으로 20명 사상…매일 95명 사망하는 ‘총기 비극’ 심각성 일깨워

 

▲ 지난 1월9일 미국 애리조나 주 투산의 가브리엘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의 사무실 앞에서 지지자와 가족들이 그녀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다. ⓒEPA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자 법치 국가이다. 그런 미국이 ‘총기 비극의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총으로 흥한 미국이 총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총기 관련 비극이 터질 때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요구뿐 아니라 총으로 더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똑같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 해묵은 총기 논쟁만 벌이다 흐지부지되고 또다시 총기 난사 사건을 겪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 주 투산에서 지난 1월8일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20명의 인명 피해를 낸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이번 총기 난사로 연방 판사와 9세 여자 어린이 등 여섯 명이 숨지고 머리에 총상을 입은 기퍼즈 하원의원을 포함해 14명이 부상당했다. 이번 총기 난사는 단순한 비극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국 정치가 총격을 받은 날로 기록되며 미국을 경악시켰다. 현직 여성 연방 하원의원을 겨냥한 정치 테러였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 가브리엘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40)을 겨냥해 총기를 난사한 용의자 제러드 리 러프너(22)는 정치 테러리스트라고 자칭했다. 그녀에 대한 암살 계획까지 세워 정치 암살 기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 러프너는 기퍼즈 하원의원을 향해 조준 사격을 먼저 한 다음 난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치 행사장이 표적…테러 우려

이번 사건으로 미국에서는 정치 테러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었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수심이 가득하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유권자와 만남을 이어갈지 난감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원들은 이번과 같이 지역구에서 소규모 만남의 행사를 갖거나 타운홀 미팅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하는 식으로 지역 구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정치 행사장이 총기 난사의 표적이 되어버렸으니 미국 정치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분위기이다.

더욱이 이번 비극이 미국 정치의 극심한 당파 대립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여 모든 정치인이 표적이 될 수도 있고 의견 분열과 당파 대립이 심한 지역 출신들이 최우선 타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정치 테러가 불붙지나 않을까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극심한 당파 대립과 반목으로 얼룩진 미국 정치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정치 테러가 폭탄이 되어 터졌다고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진단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첨예한 당파 대립만 보여왔다. 특히 지난해에는 의료 개혁을 놓고 여론이 양분되면서 현직 의원들이 살해 위협을 받아 정치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는데 이번에 그 뇌관이 터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번에 총격을 받은 기퍼즈 하원의원은 애리조나 주에 지역구를 두고 의료개혁법에 찬성하고 이민단속법에 반대했다가 보수파로부터 위협을 받아왔다. 기퍼즈 하원의원의 애리조나 주 사무실은 이미 지난해 습격을 받아 유리창이 깨지는 등 위험 신호를 받은 바 있다.

같은 시기인 지난해 3월 말 오바마 의료개혁법안이 하원에서 승인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민주당 중도파 소속이었던 바투 스투팩 전 하원의원(미시건 주)은 살해 협박을 받고 아예 중간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워싱턴 정계를 떠났다. 미국 의원들에 대한 협박이나 폭력은 지난해 1분기에 모두 42건으로 재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미국 현직 연방 하원의원을 겨냥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미국의 정치가, 독설·선동에서 협력·타협으로 전환하고 파워 구도까지 요동치게 할지 주목되고 있다. 이번 총기 난사 사건은 유망 정치인에 대한 암살 시도이자 정치 테러로 간주되어 워싱턴 정치를 뒤흔들었다. 독설·선동 정치로 탈선한 미국 정치 행태를 하루 속히 수술해야 한다는 경종이 울려퍼졌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선 바 있는 새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의 바람몰이 정치는 선동 정치라고 성토당했다. 페일린 전 주지사는 지난해 기퍼즈 의원 등을 포함해 보수 우파들의 정치적 표적을 선별한 다음 총격을 가할 과녁 표시까지 한 바 있으며 증오를 부추기는 선동 정치에 앞장서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보수 논객들인 러시 림보, 글렌 벡 등은 오바마 대통령 취임 후 민주당 진영에 대한 독설 정치로 일관해 미국의 분열과 대립, 반목과 증오를 부채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보수 우파들의 풀뿌리 정치 운동으로 기세를 올려온 티파티에 대한 시선도 따가워졌다. 물론 당사자들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다수의 공화당 의원도 정신병자의 소행을 두고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오도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최근 들어 기세를 올려온 보수 우파들의 독설·선동 정치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들은 “자성은 잠시일 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냉소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분명 보수 공화당 진영이 다소 주춤하고 오바마 대통령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해지고 있다.


독설·선동 정치 위축…오바마에 새 기회

이에 따라 페일린과 같은 형태의 선동 정치나 보수 논객들의 독설, 티파티 운동은 위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 초반부터 오바마 정책 뒤집기에 박차를 가하려던 공화당 하원의 계획도 주춤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초당적 협력 정치, 미국의 통합을 외치고 나선 오바마 대통령에게 정치적 기회를  안겨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 정치 분석가들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4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후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1995년 4월 1백68명이나 숨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 건물 테러 사건에 대처하며 단합과 통합의 메시지로 정치 지도력을 발휘해 재선의 발판을 마련했던 때와 이번 사태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번 비극을 수습하면서 정치력과 지도력을 잘 발휘한다면 클린턴 때와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미국 정치 분석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번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은 총기 폭력이 얼룩진 비극의 나라 미국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총기 폭력으로 매일 95명씩, 한 해에 3만5천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무차별 난사 사건이나 오발 사고 등으로 목숨을 잃고, 절반은 자살하는 데 총기가 사용되고 있다.

특히 미국 아이들의 총기 폭력 사망률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15세 이하 미국 아이들의 총기 폭력 사망률은 25개 선진국을 모두 합한 것보다 12배나 높다고 미국 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는 지적했다.

미국의 총기 폭력 피해자는 인구 10만명당 5.5명꼴로 계산되어 어느 선진국보다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 비해 독일은 10만명당 1.1명, 영국은 1.4명, 프랑스는 1.6명, 이웃 캐나다는 1.9명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미국 내에는 현재 3억정의 총기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연히 미국민들의 총기 소지율은 매우 높다. 현재 미국민들은 10가구 중에서 거의 4가구(37%)가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중에 34%는 권총을, 26%는 샷건을, 4%는 더 긴 장총이나 고성능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미국 시장에는 한 해에 평균 3백50만정의 각종 총기들이 쏟아져나와 매매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총기 소유권이 헌법상 권한의 하나로 규정되어 있고 연방 차원의 총기 규제는 거의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그나마 있는 총기 규제 조치도 허술해 총기 폭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미국민들의 총기 소유는 수정헌법 제2조에서 주요 권리 가운데 하나로 보장되고 있다.

총기 비극이 벌어질 때마다 워싱턴 연방 의회나 지역 의회에서는 총기 규제법이 고개를 들지만 총기를 더 많이 보유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에 묻히고는 한다. 심지어 연방 의회에서 총기 규제 법안들이 제안되자 일각에서는 의원들도 무장하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것이 미국 정치의 현주소이다. 미국의 총기 비극은 멈추지 않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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