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컵에서 드러낸 조광래의 ‘템포 본색’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1.01.2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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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팀, 패싱 게임·빠른 속도 앞세운 스페인식 축구 선보여

“한국에게서 스페인 축구를 보았다.” 이번 아시안컵대회에서 한국의 경기 내용에 대한 평가는 찬사 일색이다.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한국에 1-2로 패한 바레인 대표팀의 살만 샤리다 감독은 “한국이 경기를 지배했다. 솔직히 수준이 다른 팀이다”라며 큰 격차를 인정했다. 인도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영국 출신의 명장 밥 휴튼 감독도 “한국의 경기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승 후보답다”라고 칭찬했다.

▲ 1월 18일 아시안컵 16강전 한국-인도 경기에서 골을 넣는 지동원 선수 ⓒ연합뉴스

특히 눈에 띄는 평가는 한국 축구를 현 세계 최강 스페인 대표팀에 비견한 것이다. 이번 대회를 취재하고 있는 외신들은 하나 같이 “한국의 축구는 스페인과 닮았다. 우승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대회 최고의 팀이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부드럽고 정확한 패스를 통한 빠른 템포의 축구는 FC 바르셀로나를 복제한 것 같았다”라는 극찬도 있었다.

조광래 감독은 대표팀 감독에 취임할 당시 스페인 대표팀을 롤 모델로 꼽았다. 스페인은 유로 2008과 남아공월드컵을 제패하며 압박과 공간 장악이 대세이던 세계 축구의 흐름을 패스를 통한 창조적 플레이로 바꾸어놓았다. 한국은 세계 정상권 팀과 비교해 섬세한 기술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조광래 감독의 그런 공언은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는 아시안컵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그림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스페인식 축구에 다가서기 위한 출발은 패스 정확도를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첫 경기인 바레인전에서 대표팀은 3백72개의 패스를 시도해 2백94개를 성공시키며 80%에 가까운 성공률을 기록했다. 90%의 패스 성공률을 자랑하는 스페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남아공 월드컵 당시만 해도 우리 대표팀의 패스 성공률이 70%에 미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선수들이 습관적으로 구사하던 무책임한 롱패스와 부정확한 측면 크로스도 사라졌다. 대신 대열과 간격을 좁게 유지하며 상대를 그 안에 가둬놓고 미니 게임을 하듯이 세밀한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무너뜨려갔다. 조별 리그를 치르는 동안 한국은 하프라인 부근에서 많은 움직임과 패스가 일어나는 활동 분포도를 보였다. 바레인, 인도는 한국의 패스 게임에 밀려 자신의 진영에서 오히려 더 많이 움직였다. 유력한 우승 후보인 호주를 상대로도 한국은 볼 점유율에서 55 대 45로 앞섰다.

이런 새로운 팀 컬러는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얻은 것이다. 부임 초기 조광래 감독이 선수들에게 요구한 전술과 움직임은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전진 리베로를 앞세운 스리백(3back) 수비가 대표적이었다. 조광래 감독은 시행착오가 계속되자 자신의 고집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포백(4back) 수비로 돌아오고 대신 미드필드를 강화시켰다. 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 진출을 달성한 뒤 질의 향상이라는 숙제를 안은 대표팀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새로운 한국의 축구 컬러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자신감을 얻었다.

박지성이 침묵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아시안컵을 통해 한국이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은 박지성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 것이다. 이청용과 기성용의 등장으로 부담을 덜었지만 여전히 박지성은 대표팀에서 가장 절대적인 기둥이었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컵에서 박지성의 활약은 예전 같지 않다. 매 경기 상대의 집중 마크에 시달리는 데다 대회 중 어금니를 발치하는 바람에 컨디션 조절에도 애를 먹었다. 조별 리그에서 박지성은 단 한 개의 공격 포인트도 기록하지 못했다.

박지성이 평이한 활약을 했음에도 조별 리그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주역 구자철과 지동원을 발굴한 덕분이다. 박주영이 대회 전 갑작스런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되면서 비중이 급상승한 두 선수는 조별 리그에서 대표팀이 기록한 일곱 골 가운데 여섯 골(구자철 네 골, 지동원 두 골)을 책임졌다. 최전방의 지동원과 그 아래 배치된 구자철의 조합은 이번 아시안컵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견이다. 특히 구자철은 이전의 중앙 미드필더에서 전진 배치되어 숨어 있던 공격 본능과 2선 침투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스페인 축구의 동력인 사비, 이니에스타에 비견될 정도이다.

패스 게임을 중점으로 삼지만 조광래 감독은 많은 활동량도 강조한다. 남아공월드컵 때만 해도 대표팀은 선수 개인의 스피드를 살린 폭발적 질주로 인한 활동량이 많았다면 지금은 패스를 주고받는 플레이로 짧은 거리를 많이 움직이는 형태로 전환했다. 스페인 대표팀의 축구는 패스 횟수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활동량에서도 늘 상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대표팀의 패스 게임을 이끌고 있는 구자철, 이청용, 기성용, 지동원은 풀타임으로 뛴 경기에서 세계적 수준의 기동력 지표라 할 수 있는 11km 이상을 뛰었다. 뛰어난 재능뿐만 아니라 팀 전술을 운용할 수 있는 성실함까지 갖추어야 조광래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의 또 다른 화제는 차두리의 뒤늦은 만개이다. 남아공월드컵 당시 차두리는 오범석과 번갈아 기용되는 플래툰 시스템의 일원이었다. 힘과 체격이 좋은 유럽 팀에는 그의 장점이 먹히지만 민첩하고 기술 좋은 남미 팀에는 약하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서른 줄에 접어들어 공격수에서 풀백으로 완벽히 변신한 차두리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월드컵 이후 새 소속팀 셀틱에서 꾸준히 경험을 쌓으며 축구에 새롭게 눈을 뜬 모습이다. 기존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와 힘을 살린 파괴력에 탄탄한 수비, 완급 조절의 섬세함이 더해지며 확실한 주전으로 올라섰다.   


사우디와 중국의 조기 탈락, 왜 이런 일이?

이번 아시안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며 일찌감치 짐을 쌌다. 의외의 조기 탈락이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부진의 이유는 명백히 드러난다.

‘중동의 왕자’ 사우디아라비아는 3전 전패하는 치욕을 당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일본에 0-5로 완패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 최초로 16강에 진출했지만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는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 팀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번 대회에서 유일하게 해외파가 없는 팀이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최약체 인도마저도 미국 MLS에서 뛰는 선수를 보유한 상황에서 신기한 일이다. 자국 리그 활성화라는 명목을 앞세워 재능 있는 선수의 해외 진출을 거액의 연봉으로 가로막는 쇄국 정책이 원인이다. 장기적 비전이 없는 것도 문제이다. 지난 15년간 18명의 감독을 갈아치웠을 정도로 성적에 일희일비했다. 이번 대회도 1차전 패배 후 주제 페레이루 감독이, 3차전 후에는 알 조하루 감독 대행이 차례로 경질되었다.

동양인이 넘볼 수 없다는 육상 단거리마저 제패한 ‘스포츠 강국’ 중국은 축구 앞에서는 늘 고개를 숙인다. 남아공월드컵 당시 아시아 최종 예선에도 오르지 못했던 중국은 이번 대회에서 명예 회복을 노렸다. 그러나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받는 우즈베키스탄, 카타르, 쿠웨이트와 A조에 속했음에도 3위로 탈락했다. 지난해 2월 동아시아연맹대회에서 한국,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할 때만 해도 황금 세대의 등장에 고무되었으나 이번에도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중국통’인 이장수 광저우 헝다 감독은 “중국 선수들은 훈련 강도를 조금만 높여도 엄살을 피운다. 프로 의식이 1980년대 한국 수준이다”라며 다른 분야에 비해 성장이 더딘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의 아시안컵 최고 성적은 자국에서 열린 2004년 대회에 거둔 준우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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