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자 구도’ 많았던 역대 대선, 어떻게 흘렀나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11.05.02 19:5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거에서 ‘양자 구도’는 ‘제로섬 게임’이다. 내가 못 이기면 상대방이 이긴다. 그뿐이다. 반면 ‘3자 구도’로 가면 다양한 시나리오가 생성된다. 갑과 을이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을과 병이 연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양자 구도보다는 3자 구도가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역동적이다. 이번 4·27 재·보선을 통해 여야 전략가들 사이에서는 양자 구도가 유리할지, 혹은 3자 구도가 장기적으로 유리할지를 놓고 주판알 튕기기가 한창이다.

역대 대선 구도를 보면, 대개 양자 구도보다는 3자 구도 체제가 많았다. 그래서 훨씬 흥미를 더했다. 13대 대선(1987년)은 여당의 노태우, 야당의 김영삼(YS)·김대중(DJ)의 3강 체제였다. 양 김씨는 야권 후보 단일화 요구를 끝내 외면하고 독자 출마했다. 그 결과는 36.6%라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노후보가 당선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당시의 여론조사 시스템이 만약 지금처럼만 과학적이었다면, YS와 DJ는 후보 단일화를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역사는 바뀔 수 있었다”라고 전망했다.

14대 대선(1992년) 역시 YS와 DJ 그리고 정주영 후보 3자 구도였다. 선두는 YS였다. 순리대로라면 DJ와 정후보가 손을 잡아야 그나마 뒤집기 가능성이 있었으나, 진보 성향의 DJ와 보수 성향의 정후보가 손을 잡기에는 이념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 면에서 15대 대선(1997년)은 상당히 이례적인 결과를 낳았다. 당시 여당의 이회창 후보에 맞선 야권의 후보는 DJ와 JP(김종필)였다. 이들 역시 이념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끝내 DJP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단일 후보가 된 DJ는 단숨에 이후보를 추월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1980~90년대 당시만 해도 3김씨가 갖고 있던 지역적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은 거의 힘든 결합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3자 구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대선은 지난 16대 대선(2002년)이었다. 당시는 선두 이회창과 2위 그룹 정몽준·노무현의 견고한 틀이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필패’라는 위기감에 정후보와 노후보는 단일화에 합의했고, 결국 이것이 막판 대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진보 성향의 노후보와 중도 성향의 정후보가 보수 성향의 이후보를 코너로 몬 전략이 주효했던 셈이다.

지난 17대 대선(2007년) 역시 일찍부터 이명박-박근혜-고건의 3자 구도가 정착되었으나, 문제는 이때 1, 2위는 모두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들이었다는 점이다. 역부족을 느낀 범여권의 고후보는 중도 하차했고, 한나라당 경선에서 사실상 승부는 판가름 났다. 이후 17대 대선은 역대 유례가 없는 이명박 독주 체제로 흘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