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 안 가리는 ‘코 묻은 돈 뺏기’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11.05.10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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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떡볶이 사업·피아노 교습소까지 진출…정부, ‘중소기업 적합 업종’ 선정해 제동 걸기로

 

ⓒ 일러스트 찬희

정부가 대기업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오는 8월까지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최종 선정해 발표한다. 선정된 업종에는 최대 6년 동안 대기업의 진출이 제한된다. 김경래 한국문구도매업협동조합 이사장이 “코 묻은 돈까지 빼앗아간다”라고 강하게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대기업은 체격에 맞지 않게 영세한 업종까지 빠르게 잠식해나가고 있다. 금형을 비롯해 재생 타이어, 두부, 장류, 문구, 심지어 떡볶이 사업, 사진관, 피아노 교습소까지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계열사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20대 민간 대기업 계열사 숫자는 2008년 4월에 6백78개였던 것이 올해에는 9백22개로 2백44개(36%) 늘어났다. 이들의 자산 총액도 6백83조6천억원에서 1천54조4천억원으로 3백70조8천억원(54.2%)이나 증가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는 반면, 중소기업체 사장들의 입에서는 연신 죽겠다는 말이 터져나오고 있다.

영세한 업종의 전체 매출액이 떨어지는 이유

20년째 문구 유통업을 하고 있는 김경래 문구샵 이사장은 지난해 처음으로 매출이 10% 줄어들었다. 해마다 1%씩 매출액이 상승하며 1백20억원까지 매출을 끌어올렸지만 지난해 15억원이 감소해 1백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김이사장은 “단 한 번도 매출이 줄어든 해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삼성과 LG가MRO(Maintenance Repair Operation; 소모성 자재) 구매 대행 사업에 뛰어들면서 유통량이 확 줄어들었다. 전국 회원사가 1백90개나 되었지만 최근 이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정부가 규제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내몰렸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그룹에서 운영하는 MRO 업체인 아이마켓코리아는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로 해마다 10% 이상 고속 성장하고 있다. 2009년 1조1천8백21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에는 1조5천4백92억원으로 뛰어올랐다. 삼성 이외에도 LG그룹의 서브원, SK그룹의 스피드몰, 포스코그룹의 엔투비, 코오롱그룹의 코리아e플랫폼, 웅진그룹의 웅진홀딩스 등 웬만한 기업은 MRO 사업을 하고 있다.

두부 업종은 더 심각하다. 2006년 정부가 고유 업종 제도를 폐지하기 직전인 2005년, 대기업은 두부 업종에 진출하기 위해 공장을 모두 준공했다. 고유 업종 제도란, 1989년 제정된 사전적 규제 장치로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대기업들의 신규 참여나 확장을 금지시킨 업종을 말한다. 최선윤 강릉초당두부 회장은 “두부 시장의 35%를 3개 대기업인 CJ, 풀무원, 대상이 장악하고 있다. 나머지 시장을 갖고 1천8백여 개나 되는 영세한 중소업체들이 나누어 먹는 식이다. 영세하다 보니 대기업처럼 원플러스원(1+1) 행사 같은 것은 꿈도 못 꾼다. 당연히 이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에 납품 업체로 선정될 수도 없다. 발버둥을 쳐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라며 씁쓸해했다.

두부업계에서 형님 격인 최회장은 대기업의 진출에 맞서고자 2007년에 80억원을 들여 시설 투자를 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의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덤볐지만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최회장은 “주위에서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투자를 했지만 매출이 오르지 않고 있다. 일본은 두부 시장이 국내보다 2.5배나 더 크지만 대기업이 뛰어든 사례가 없다. 우리만 무방비 상태에서 대기업에게 휘둘리고 있다”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인력 빼가기도 서슴지 않는다. 기술자의 숙련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금형 산업에서 이런 행태가 두드러진다. 삼성전자에 이어 LG전자 역시 올해 금형기술센터를 세우기로 하면서 최근 대규모 인력 채용에 나섰다. 당연히 중소기업에 다니는 금형 숙련공들 자리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금형조합 관계자는 “중소기업들이 인재 양성을 위해 빠듯한 살림에 장학금도 주면서 노력한 결과이다. 최근 대기업들이 손 안 대고 코푸는 격으로 상도덕을 저버렸다”라고 비판했다. 그 밖에도 재생 타이어, 골판지, 스팀청소기 등 돈이 된다 싶은 곳이라면 대기업이 모두 진출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표 참조).

 


시장 키워 경쟁력 강화하겠다고 했지만…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영역에 뛰어들면서 내세우는 논리 가운데 하나가 시장을 키워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다. 막걸리 열풍과 함께 지난해부터 CJ, 오리온, 롯데주류, 진로가 막걸리 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나 막걸리의 시장 점유율은 오히려 주춤하고 있다. 전체 주류(출고량 기준)에서 막걸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8년 5.3%에서 2009년 8.0%로 급등했지만 대기업이 대거 진출한 지난해에는 10%를 겨우 넘어섰다. 생산 증가율 역시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속적으로 둔화되고 있다.

참살이 탁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난해 KBS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로 유명세를 타며 매출이 급증하던 참살이 탁주는 그해 5월, 오리온그룹 계열사인 미디어플렉스로 넘어갔다. 그런 뒤 오히려 매출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막걸리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노하우가 없는 탓이다. 브랜드를 키우고, 고급화시키고자 대기업에 넘겼는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대기업은 비판 여론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오는 8월, 정부가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선정해 발표하고 나면 그때 가서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겠다는 입장이다.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본부장은 “세계적으로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지정하는 나라는 없다. 대기업의 시장 참여를 인위적으로 제한하면 중소기업이 자생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에 대해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유 업종 제도가 폐지되고 난 이후 중소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는 등 뿌리 산업이 흔들리는 폐해가 나타났다.

일본이나 미국은 이러한 제도가 없음에도 영세한 업종에는 뛰어들지 않는다.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영세한 업종을 보호해주었더라면 정부가 사전적 규제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기업이 자초한 결과이다”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일단 올해 8월, 제조업에 한해 적합 업종을 선정한다. 유통과 서비스 업종으로의 확대는 올 하반기 이후에나 이루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적합 업종 선정은 강제 조항이 아닌 권고 사항이기 때문에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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