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고르는 대중문화, ‘복고 열풍’ 속으로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1.06.15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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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예능 프로그램·영화 등 장르 불문 ‘옛것·옛 인물’이 대세…“신작들 압박해서는 안 돼” 지적 많아

▲ ⓒMBC
 20세기가 귀환하고 있다. 옛것, 옛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언론은 ‘복고 열풍’이라고 진단한다. 냉정하게 말해 아직 열풍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복고적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흐름의 시초로는 <슈퍼스타K>를 꼽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참가자에게 제시된 미션곡 중에는 1980~90년대 명곡이 많았다. 시청자는 <슈퍼스타K>를 보며 옛 노래가 단순히 흘러간 유행가 수준이 아니라, 이 시대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재발견했다.

그 흐름은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다시 <위대한 탄생>과 <나는 가수다>로 이어지고 있다.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가히 20세기 명곡의 향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원곡까지 뜨고 있다. 조용필의 ‘위대함’이 젊은 층에게 새삼 인식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예능에서도 20세기가 활약한다. <무릎 팍 도사>는 이장희, 윤복희, 김완선을 차례로 불렀다. <놀러와>에서는 이선희가, <승승장구>에서는 남진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추억을 찾는 ‘중년판 1박2일’로 알려진 <낭만을 부탁해>와 아이돌이 과거의 명곡들을 부른다는 <불후의 명곡2>도 새롭게 시작되었다. 영화계에서는 <위험한 상견례>의 깜짝 흥행이 복고의 시작을 알렸다. 1980년대 말을 배경으로 촌스러운 청청 패션과 원색 셔츠의 풍경이 그려진 영화였다. 그리고 이어진 <써니>의 대박이 바로 ‘복고 열풍’이라는 진단이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써니>는 대단히 세심하게 과거를 재현했다. SBS 라디오는 올봄에 구창모·변진섭·이성미·장두석·김기덕 등 왕년의 스타를 DJ로 기용하기도 했다. 패션계에서는 ‘땡땡이’ 무늬와 비비드 컬러의 인기가 되살아나고 복고 샌들이 나타난다. 공연계에서는 1980~90년대 히트곡으로 이루어진 <광화문 연가>나 <젊음의 행진>이 인기를 끌고 있다.

휴대전화나 노트북까지 순식간에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버릴 듯한 스마트폰·태블릿 PC의 시대. 트위터와 얼리어답터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왜 20세기인 것일까? 기본적으로는 30대 이후의 세대가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구매력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기성세대에게 물질적 자원이 풍부하다는 조건은 언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왜 지금 복고인가라는 물음에는 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

▲ 이소라 ⓒMBC
‘20세기’가 돌아오는 이유

현재가 괴로우면 사람은 당연히 과거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20세기를 호출한다는 것은 21세기가 괴롭다는 뜻이다. 즉, 복고 열풍은 첫째로 현재의 불만족이 원인이다.

1차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아이돌, 기계음, 댄스 음악이 덮어버린 가요계 풍경이다. 대중이 거기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70, 80, 90년대를 호출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더욱 괴로운 현재의 사회 상황을 꼽을 수 있다. 한마디로 각박하고, 황량하고, 차갑다. 우리에게 21세기는 무한 경쟁으로 표현되는 불안과 고통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것을 원하게 되었다.

요즘 공연계에서 뜬다는 ‘엄마’ 코드나 드라마 쪽에서 각광받고 있는 ‘바보’ 캐릭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안에 지친 사람들은 엄마의 따뜻한 품을 찾고, 바보의 순수함에서 각박해진 마음을 달랜다. 복고도 이런 따뜻함, 안정감, 순수함 등을 느끼게 한다.

둘째, 복고 열풍은 한국 대중문화의 성장이나 자부심과도 관련이 있다. 한류 열풍이라는 것은 어쨌든 서양을 보고 배웠던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성장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이 된 것이다. 그 다음에 할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옛 콘텐츠는 단순히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뿌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그 뿌리를 확인하고 재흡수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면 토대가 튼튼해진다.

또, 세시봉에서 <나는 가수다>까지를 통해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아름다웠고 풍성했었나를 새삼 확인하며 기성세대와 젊은 층이 동시에 자부심을 느낀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에게 무시당했던 자신들의 문화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젊은 층은 한국 문화의 뿌리가 상상 이상으로 크고 넓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셋째, 디지털의 습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을 꼽을 수 있겠다. ‘스마트폰과 얼리어답터의 시대인데도 왜 복고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디지털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날로그적 정서를 찾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청량함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세시봉의 통기타였고, 그것은 ‘통기타 든 소녀’ 아이유 열풍에도 영향을 미쳤다.

▲ ⓒ CJE&M 제공
“복고가 미래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

복고 열풍에 대한 가장 음산한 해석은 우리 대중문화가 이제는 늙어버렸다는 지적일 것이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에 집착하는 법이다. 미래가 없으니까, 문화도 미래로 도약하는 힘을 잃었을 때 과거의 좋았던 추억에 안주할 수 있다. 지금 상황이 과거 일변도인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가수다> 현상만은 우려스럽다. <나는 가수다>는 일종의 과거 히트곡 모음인데, 그것이 현재의 창작곡을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이다. 이런 것이, 우려되는 복고이다.

복고는 우리 대중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양성을 키우며 창조성의 새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에서만 건강하다. 그저 과거 빛났던 시절에 도취하는 복고는 퇴폐적이다. 새 것에 대한 실험성, 모험 정신이 넘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 히트했던 것,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대접받는 상황에서는 모험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러면 미래를 열어가는 활력이 사라질 것이다. 창작자가 명곡의 편곡에 집중하고, 기획자는 추억 팔기 상품이나 디자인할 때 무슨 창조적 활력이 생기겠나.

물론, 오로지 최신 가요만 듣던 분위기에서 현재의 복고 열풍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거꾸로 ‘최신’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과거는 현재를 보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결코 과거가 주인이 되면 안 된다. 이 점을 명심해야 건설적인 복고 트렌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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