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인 이건희 회장, 신체제 구축 노리나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1.06.15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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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내부 비리를 이례적으로 자청해서 언론에 공개한 배경에 눈길 쏠려

▲ 이건희 회장이 6월9일 삼성전자 본관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그룹에 ‘A급 사정 태풍’이 들이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한때 그룹 내부에서 암호명 A로 통했다. 이 암호명 A가 ‘은둔의 황제’라는 별칭에 어울리지 않게 기업 내부 비리를 자청해서 언론에 공개했다. 이회장은 지난 6월9일 오전 9시, 출근 시간에 맞춰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삼성전자 본관 1층 로비에서 기다리던 출입기자단에게 다가와 “삼성그룹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지난 6월8일 삼성전자 본관 39층에서 열린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 참석자 40여 명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수요일마다 열리다 보니 ‘수요 사장단 회의’라고 일컫는 삼성그룹 대표이사(CEO) 모임에 참석한 김순택 미래전략실 부회장이 ‘A의 분노’를 전달한 탓이다. 

A급 태풍의 발원지는 경상남도 창원시에 본사를 둔 삼성테크윈이다. 삼성테크윈은 방위산업체이다. 감시 카메라나 반도체 장비도 생산하지만 매출 비중이 가장 큰 사업 부문은 K-9 자주포나 F15K 전투기용 엔진을 비롯한 방산 제품군이다. 삼성테크윈이 육군에 납품한 K-9 자주포가 고장이 나면서 삼성그룹은 전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지난해 11월23일 북한군이 방사포(다연장 로켓)로 연평도를 포격했을 때 연평도 진지에 설치된 K-9 자주포 6문 가운데 3문이 고장 났다. 보수 단체까지 나서 이명박 정부를 ‘국가 방위 능력과 위기 대응 체계가 부족하고 국가 방위 능력이 없는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청와대 고위 인사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고위 임원을 만나 불편한 심기를 전달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룹 경영진단팀은 최고위 경영자로부터 지시를 받거나 자체 판단으로 계열사 감사에 착수한다. K-9 자주포 고장은 삼성테크윈이라는 개별 기업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삼성그룹이 망신당한 것이라고 보고 그룹 경영진단팀이 나섰다”라고 말했다. K-9 자주포 납품 관련 비리는 오래전부터 불거졌다. 2009년 K-9 탄약 장전 장치를 삼성테크윈에 납품하던 외국계 방산업체가 부품 단가를 최고 4배 이상 부풀려 부당 이익 41억원을 취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감사원은 지난 4월 K-9 자주포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여 일부 기어 부품이 국방 규격에 미달한 것을 적발했다. 

삼성테크윈 임직원 90여 명 징계 거론돼

▲ 삼성테크윈이 육군에 납품한 K-9 자주포. ⓒ연합뉴스

지난 2월 말 경영진단팀이 불시에 삼성테크윈 본사로 들이닥쳤다. 경영진단팀 소속 감사 요원은 회계 감사와 탐문 수사를 병행하면서 임직원 다수가 법인카드를 개인 용도로 사용한 사실을 적발했다. 이 과정에서 감사 요원은 협력업체 관계자까지 만나 삼성테크윈 임직원이 납품업체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았는지를 추적했다. 삼성그룹 내부 관계자는 “경영진단팀은 계열사 경영 행태를 감사하거나 비리를 밝혀내기 위해 계열사 감사에 나선다. 삼성테크윈은 처음부터 비리를 추적하는 차원에서 감사에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오창석 삼성테크윈 대표이사는 지난 6월8일 ‘암호명 A의 진노’를 전해 듣자마자 사퇴했다. 임원 10명 안팎과 직원 80명에 대한 추가 징계까지 거론되고 있다. 삼성테크윈 임직원 수는 4천9백명가량이다. 임직원 2% 안팎이 비리와 연루된 것이다. 공장 운영이나 납품 행태와 관련해 오랫동안 관행처럼 자리 잡은 비리라는 추측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임원이나 고위 간부가 직원을 시켜 납품업체에게 향응과 뇌물을 요구한 행태가 관행으로 자리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건희 회장이 “향응도 있고 뇌물도 있지만 제일 나쁜 것은 부하 직원을 닦달해서 부정을 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삼성 계열사 직원은 “6월8일 오전 삼성그룹 내부 전산망 마이싱글(삼성그룹 인트라넷) 초기 화면에 ‘부정한 법인카드 사용은 횡령이며, 술·골프 접대를 받는 것은 향응’이라는 경고 문구가 올라왔다. 삼성테크윈 비리가 법인카드 부정 사용·향응과 관련되지 않았겠나”라고 말했다. 삼성테크윈 임직원 일부가 가족과 식사하거나 대낮에 사우나에 출입하면서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납품업체로부터 술과 골프 접대를 받았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이와 관련해 ‘기업 내부 비리 사건을 외부에 공표할 수 없다’라는 입장이다.  

경영진단팀은 ‘저승사자’로 불린다. 경영진단팀 소속 상무나 전무는 계열사 사장까지 불러 심문할 수 있다. 한 번 감사에 들어가면 1~2개월 계열사를 샅샅이 뒤진다. 지난 2005년 이건희 회장에게 보고한 ‘삼성전자 월드컵 공식 후원’ 관련 회의 자료가 <시사저널> 기자에게 유출된 적이 있다. 당시 삼성구조본 경영진단팀은 임직원 가운데 해당 기자와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는 지인을 소환해 심문했다. 이 과정에서 유출자로 오해받은 직원은 휴대전화 3개월 통화 내역까지 제출해야 했다. 조사 방식이나 수법이 치밀하고 집요해 감사에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경영진단팀이 감사해서 무사한 곳이 없다.

경영진단팀은 주요 계열사마다 평균적으로 3~4년에 한 번 정기 감사를 실시한다. 지난해 그룹 경영진단팀이 감사한 계열사는 4곳이고, 올해에는 2곳이나 된다. 그룹 경영진단팀 소속 임직원은 20명 안팎이다. 그룹 감사 횟수가 유난히 많아졌다. 삼성그룹 내부에서 1~2년 사이에 한꺼번에 그룹 감사가 다섯 곳 이상 집중되는 사례는 드물다. 지난 4월에는 삼성카드가 삼성SDS와 부당 카드 할인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자 경영진단팀이 나섰다. 김 아무개 삼성SDS 부장이 외국계 기업과 국회의원 명의를 도용해 기프트카드 63억원어치를 외상으로 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전자 CIS(독립국가연합) 총괄장은 공금을 유용해 별장을 세운 사실이 러시아 언론에 보도되면서 올해 초 경영진단팀이 투입되었다.

삼성그룹 임직원이 횡령이나 향응 같은 비리에 연루되는 사건이 잦아지자 이회장은 위기의식을 느낀 듯하다. 이회장은 지난 6월8일 삼성테크윈 비리를 질타하면서 ‘경영진단팀 인원을 늘리고 직급과 보수를 올려라’라고 김순택 부회장에게 지시했다. 삼성 계열사 관계자는 “(삼성테크윈 감사) 파장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경영진단팀이 움직이면 어김없이 피바람이 불었다. 경영진단팀이 확대·보강되면 그룹 차원의 계열사 감사가 늘어나지 않겠나. 그만큼 날아가는 임원 목도 늘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회장의 직할 통치를 통한 ‘인적 쇄신’이 이루어지면서 삼성의 세대교체 작업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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