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를 품어 펼쳐낸 불심의 배우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11.06.2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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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사진전 여는 리처드 기어를 만나다

ⓒ시사저널 박은숙

서울에 있는 예술의전당 갤러리에 걸려 있는 사진 한 장이 유독 눈에 밟힌다. 그 사진 옆에는 <학대의 방법>이라는 제목과 함께 ‘인도 다람살라의 벽에 있는 드로잉과 중국군의 고문에서 탈출한 세 명의 여승’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이자 사진작가로 유명한 리처드 기어(62)가 1996년에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다.

“인도 서북쪽에 다람살라라는 도시가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곳이다. 그곳 한 수도원 흙벽에 여러 장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중국군들이 티베트 승려들을 고문하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 당시에 세 명의 여승을 만났는데, 티베트에 있는 중국 감옥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 승려들이 그 벽에 있는 그림들에 대해 내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들과 담벼락에 있는 그림들을 한 사진에 담았다. 그 사진을 찍고 며칠 후에 비가 내려 벽에 있던 그림들이 다 지워져버렸다. 내가 찍은 사진이 아마 그 그림을 남긴 유일한 사진일 것이다.”

제목은 <순례의 길>로 중국 고발하는 내용

▲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가 지난 6월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사진전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티베트와 관련된 사진을 모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사진 중에는 흔들린 것도 있고 안개가 낀 듯 뿌연 것도 있다. 이런 사진들을 훑어가노라면 마치 순례자의 발꿈치를 따라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전시회 제목이 <순례의 길>인가 보다. 그러나 그가 이 사진들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중국이 티베트인들에게 자행하는 인권 유린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리처드 기어는 늘 웃음을 잃지 않지만 티베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은 정색한다. 그의 얼굴과 눈빛은 티베트인들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사진들을 보고 티베트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 사진을 찍을 당시 상황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을 이해하고 사진을 보면 내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티베트에 있는 중국 감옥에서는 아직도 고문과 사형이 자행되고 있다.”

그의 사진 찍기는 약 5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나름의 사진 철학도 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내게 작은 박스 모양의 카메라를 선물로 주었다. 코닥 브라우니라는 카메라이다. 별다른 기능 없이 단순한 사진기인데, 사진을 찍으면 네모난 이미지가 나온다. 그 사각형 사진에 세상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또 그 사각형에 세상을 집어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깨달았다. 누구를, 무엇을 찍고, 어떻게 편집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감성, 감정에서 나온다. 피사체를 내 감정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예술은 탄생하지 않는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서로 느끼지 않으면 인간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커피숍에서 여자친구를 만날 때 두 가지 반응이 생긴다. 감정을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거나. 느낀다면 그때부터 무언가가 시작된다. 그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사진가 개인의 경험을 담은 것이다. 내 사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생각이 없고, 평가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사진을 공개한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다.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로서 돈을 벌 만큼 벌었을 텐데 돈이 필요하다니 무슨 말인가 싶다. 그 이유를 듣기 위해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신인 배우 시절인 1978년 그는 네팔 등지를 여행했다. 그때 티베트와 인연을 맺었다. 긴 세월 동안 그는 짬이 날 때마다 티베트를 찾았다. 그곳에서 중국에 억압당하는 티베트인들을 목격했다. 1987년 그는 망명한 티베트인들을 위한 보금자리(티베트 하우스)를 마련했다. 운영 자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24명의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을 설득해 작품을 기증받고, 자신이 찍은 사진 64점을 보태서 세계를 순회하며 사진전을 열고 있다.

“불교가 한국의 역사에 미친 영향 궁금”

“지난 30여 년 동안 찍은 사진들이다. 오래전의 사진을 다시 보니 감개무량하다. 사진 속 이미지는 티베트의 형제자매들, 또는 그들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그렇다. 티베트뿐만 아니라 인도, 네팔, 부탄, 몽골 등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이 지역들에는 비슷한 문화적 배경이 깔려 있다. 종교도 같다. 이 종교는 히말라야에서 시작되어 2천5백년을 이어왔다. 히말라야 북부 아시아를 거쳐 한국에까지 불교가 전해졌다. 불교는 한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해서 기쁘다.”

그는 6월20일 6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에 왔다. 첫 방한이지만 오래전부터 한국과 인연을 이어왔다고 했다. 어느 날 우연히 한국 방문 기회가 마술처럼 찾아왔다고 덧붙였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제자 중에 한국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만나면서 한국을 접했다. 달라이 라마는 한국 제자들이 총명하다고 했고, 나도 그렇게 느꼈다. 아무튼, 몽골에 갈 때마다 한국을 거쳤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했나 보다. 마지막으로 몽골을 방문할 때 마침 서울에서 사진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마치 마술처럼.”

그가 한국에서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조계사였다. 194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토종 미국인인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그는 불교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조계종은 선불교의 일종인데, 내가 일본의 선불교를 통해 불교에 입문했다. 조계사 건너편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채식 중에 최고였다. 조계사 방문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스님과 불자들이 모두 친절했다. 6세기 무렵에 불교가 한국에 전파된 것으로 안다. 그때부터 불교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다. 불교가 한국의 과거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한국 불교를 카메라 앵글에 담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했다. 불교 신자답게 여러 번의 방문을 통해 인연의 고리를 찾은 후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사랑에 빠지려면 찰나가 필요하다.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다음에 또 오고 싶은 마음도 있다. 시간을 두고 그 찰나를 느껴볼 참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야기가 쌓인다. 그때야 사진을 어떻게 찍을지 알게 될 것 같다.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나의 단점은 사적인 만남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항상 언론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해 깊은 감성을 느끼려면 앞으로 더 많이 한국을 방문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

한국인에게 그는 멋스럽게 늙은 영화배우이다. <사관과 신사> <귀여운 여인> <하치 이야기> 등을 통해 그의 연기를 보아온 여성이라면 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한국 여성 팬들에게 그는 재치 있는 인사말을 전했다.

“사실 내 나이가 93살이다(물론 농담이다). 이 자리에 내 변호사도 있지만, 한국 여성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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