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 보존도 힘든데 ‘아리랑 공정’ 막겠나”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7.0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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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선 아리랑연구소 소장, ‘조선족 아리랑’이 중국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후 사정과 대책에 대해 말하다

▲ 진용선 소장 ⓒ시사저널 전영기


지난 6월 중순 중국 최고 국가 행정 기관인 국무원이 조선족의 민요와 풍습이 포함된 제3차 국가 무형 문화유산을 발표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아리랑과 랴오닝 성 톄링 시의 판소리, 가야금,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 씨름 등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한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이 중국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5년 환갑례와 전통 혼례, 한복, 악무 등이, 2009년에는 농악무가 중국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국내 여론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번에 중국 당국에서 아리랑을 국가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는 현지 조선족의 요구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란이 일고 있다. 진용선 아리랑연구소 소장은 아리랑 연구를 위해 1990년 이후 중국을 30번 이상 찾아가 지난 2008년 <중국 조선족 아리랑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상하이에서 항저우까지 유리창이 없는 버스로 이동해 항저우에서 다시 베이징까지 프로펠러기를 타고 가서 육로로 연변을 찾아가던 고단한 시절부터 그는 조선족의 아리랑을 채록했다. 그를 만나서 이번 사태에 얽힌 조선족 교포 사회의 고민과 아리랑의 현재 의미를 들어보았다.

그는 먼저 “우리가 ‘동북공정’에 대한 피해 의식 때문에 흥분하고 있는데, 중국 정부는 아리랑과 관련된 공식 입장을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좀 더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소장은 이번 사안이 보도된 뒤 현지 조선족과 전화로 나눈 대화를 전했다. 이번 일을 추진한 한 조선족은 “우리는 중국 정부에서 빨리 해주기를 바랐다. 사실은 늦었다. 조선족 문화를 보존하려면 중국 정부가 지원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족 입장에서 보면 중국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조선족 문화가) 살아남을 수 없다. 한국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선족 해체 위기는 중국 조선족 사회의 제2의 디아스포라(이산)가 자리 잡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월경해 만주에 자리 잡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집단 이주 경험이 첫 번째 디아스포라였다면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개방 정책이 자리 잡으면서 조선족이 몰려 살았던 옌볜(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해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두 번째 디아스포라이다. 옌볜의 조선족 대다수가 한국으로 일하러 떠나거나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저 멀리 광저우까지 산업 도시로 떠나면서 옌볜 자치주가 급속도록 공동화되고 있다. 조선족이 떠난 자리는 한족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결국 조선족 3, 4세는 조선어를 배울 기회도, 쓸 기회도 없어지면서 빠르게 중국 공민화가 진행되고 있고 조선족의 고유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현장 연희자를 중심으로 보존을 하기 위해 중국 정부의 지원을 요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저간의 배경을 이해한다 해도 집단 이민자 커뮤니티의 고유 문화를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나라에 캄보디아나 베트남에서 온 신부가 아무리 많아도 캄보디아나 베트남의 세시 풍습을 우리의 고유문화로 지정해 보존하는 일은 가능성이 극히 작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진소장은 “중국 현지에서 아리랑은 전통 민요, 항일 저항 노래, 근래에 현지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통용되고 있다. 근래 들어 생긴 <연변아리랑>은 박자나 음색이나 가사가 우리 정서와 많이 다르다. 북한 음악이나 현지 중국 음악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즉 ‘중국 공민’인 조선족이 현지에서 새로 생산해낸 아리랑이 우리가 아는 아리랑과는 다른 독자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리랑과 다른 독자적인 노래로 자리 잡아

▲ 2006년 발표된 공연. ⓒ진용선 제공

아리랑은 다민족 사회인 중국에서 조선족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90년 초반 중국 후난 성 주주 시에서 열린 전국 소수 민족 경연대회에서 연변의 조선족 음악 단체가 참가해 <대형 가극 아리랑>이라는 작품으로 ‘우수 극목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1991년 6월 중국 예술 분야 최고상인 중국문화신극목 대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중국 내 56개 민족 사이에서 아리랑은 조선족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를 잡았다. 2006년에 <천년 아리랑>이라는 작품이 발표되어 큰 인기를 얻고 상을 받기도 했다. 진소장은 이 작품이 “조선 민족의 아리랑이라는 느낌보다는 조선족 아리랑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리의 색동옷 색감보다는 중국인이 선호하는 빨간색 위주의 무대 의상으로 수백 명이 출연하는 스펙타클한 중국식 가극으로 만들어졌다”라고 전했다.

아리랑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화되고 있는 맥락이기도 하다. ‘아리랑의 세계화’는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 때문이기도 하다.

아리랑의 세계화는 조선조 말과 일제 시대에 걸쳐 하와이와 멕시코, 북만주와 일본 쪽으로 집단 이주를 떠난 한민족의 유랑·걸식의 역사이기도 하다. 만주로 이동했던 조선족은 북만주, 연해주로 이동했다가 스탈린 철권 통치기에 18만명이 카자흐스탄 오지로 강제 이주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고난의 연대에 수많은 아리랑이 탄생했고, 이 아리랑은 한민족과 함께했다. 진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만 변했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우리 국력이 강하면 중국에서 소수 민족 문화로 지정했다고 해도 우리가 흥분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지 조선족의 요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에서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에서 보듯 ‘순수하지 않기’에 우려를 낳고 있다. 동북공정처럼 아리랑을 조선족과 조선 문화를 중화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지렛대로 삼는 ‘아리랑 공정’으로 활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소장은 아리랑의 문제에서는 우리 내부의 문제가 더 크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정선아리랑>만이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 국가 차원의 보존 대책이나 활용 대책이 전혀 없다. 오로지 과거의 기록만 민간 차원에서 수집하고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중국의 아리랑은 활용도 면에서 한국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세기 초반의 아리랑을 ‘포르말린 용액에 담아 보존 처리’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것이 고작인데 비해 중국에서는 현재형의 아리랑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청산리 아리랑>(박규철 작사집), 텔레비전 드라마 작품집 <아리랑>(리광수 지음), <대중가요집 새아리랑>(연변인민출판사) 등 아리랑을 활용한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연변일보 누리집에서 아리랑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수많은 아리랑이 나온다.

▲ 중국 왕청 현 길상촌에서 아리랑을 채록하고 있는 진용선 소장(왼쪽). ⓒ진용선 제공

진소장은 “아리랑을 보존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도 좋지만 활용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주어야 한다. 우리도 가극이나 드라마로 만들어 보급하고 이런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중국이 우리보다 활용하는 측면에서 앞섰다. 지금 중국에서 나오는 아리랑은 조선족의 힘든 정착 과정을 담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혁명 과정에 동참하는 중국 공민으로서의 삶을 담고 있다”라고 전했다.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현지에 정착한 조선족이 3세, 4세로 넘어가면서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민을 담는 틀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옌볜 자치주가 옌볜을 ‘가무의 고향’으로 내세우면서 <천년 아리랑>을 관광 브랜드로 내세우는 것은 그런 생존 활동의 일부이다.

진용선 소장은 수많은 답사와 현지 조사를 기반으로 2004년 <사할린 아리랑>, 2008년 <중국 조선족 아리랑>, 2009년 <고려인 아리랑>, 올 초 <일본 아리랑>을 펴냈다. 5년 전부터는 <하와이 아리랑>을 쓰기 위해 이주 기록과 사진 자료 등 기본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인류학과 한국 근현대사, 국문학, 국악을 넘나드는 이런 방대한 작업은 모두 그의 현장 방문을 거쳐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는 “정부가 나서서 현지 영사관이나 이런 데서 조금만 도와주면 작업이 쉽게 풀릴 텐데 참 아쉽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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