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의 아픔 변주해 다양하게 피어난 한민족의 ‘울림’
  • 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아리랑아카이브 대표 ()
  • 승인 2011.07.1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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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 많은 민족사가 만들어낸 중국·러시아·일본 지역 ‘아리랑’의 기원과 변천사

중국이 아리랑을 중국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대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은 지난 호 ‘아리랑’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세계로 간 우리 아리랑의 변화상을 짚어보았다.  

▲ 중국 연변가무단의 대형 음악무용시 . 2006년 9월 베이징 에서 열린 제3회 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에서 최고 대상을 받았다. ⓒ진용선 제공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노래이다.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있고, 누구나 한 곡쯤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리랑이다. 2002년 여름, 광장을 가득 메운 한국인의 붉은 파도는 아리랑을 목청껏 부르며 아리랑 고개를 훌쩍 넘어 월드컵 4강까지 진격했다. 한이 아닌 흥이었다. 하지만 한민족에게 가장 참혹한 시기였던 19세기 말 한반도를 떠나 유랑걸식을 떠난 한민족에게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수모와 학대를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틸 수 있었던 삶의 기둥이었고, 그들은 아직도 아리랑에 의지해 삶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민요 아리랑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조 말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듣고 즐거워하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나운규가 연출하고 주연을 한 무성 영화 <아리랑>은 아리랑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억눌린 민족의 한을 풀어내려고 해서였을까. 아니면 3·1운동의 좌절감에 절어온 삶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서였을까. 서울 상영 첫날부터 관객이 구름 떼처럼 단성사로 몰려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제가인 아리랑을 가슴 깊이 새겼다. 당시 부르던 아리랑은 경기 자진아리랑을 모태로 해서 나운규가 편곡한 신민요로 지금 우리가 흔히 듣는 아리랑이다.

무성 영화 <아리랑>은 무려 2년6개월 동안이나 전국 곳곳을 순회 상영했다. 주제가로 불린 아리랑은 그 이전의 아리랑을 넘어 아리랑의 대표성을 띠게 되었다. 아리랑 열풍 속에 1930년대부터는 ‘아리랑 노래’ ‘강남 아리랑’ ‘아리랑 술집’ 등 아리랑이라는 제목을 단 유행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리랑의 유행과 맞물린 구한말~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가혹한 시기였다. 수해와 기근, 삼정(三政)의 문란과 대규모의 민란이 이어진 18세기 후반부터 굶주림에 시달린 많은 이들이 중국과 러시아, 일본 심지어는 하와이, 멕시코까지 내몰렸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 불리는 이산은 통한의 아픔을 가져왔다. 중국·러시아·일본의 아리랑은 굴곡 많은 민족사가 만들어낸 아픔의 소산이었다.

▒ 중국 정부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조선족 아리랑

▲ 1958년에 중국 연변 조선족 문학의 구심점이 되었던 문예지 . 1951년 6월 창간한 가 1957년부터 으로 제호를 바꿔 달았다. ⓒ진용선 제공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 땅으로 이주한 우리 핏줄이 있었다. 이주와 함께 전해진 아리랑은 우리와는 다른 토양 속에서 항일 저항가, 새로운 창작 가요로 뿌리를 내렸다. 이주 1세대가 부른 아리랑은 후손에게 전승되었다. ‘아리랑’을 비롯해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등 고향의 노래는 잔치 때나 유희의 공간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주 1·2세대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리랑도 차차 사라져갔다. 그나마 남은 아리랑은 세월이 지나면서 음조와 음색, 창법이 변한 채 전승되고 있다.

독립 투쟁의 근거지에서 아리랑은 일제를 타도하자는 내용, 고향과 조국을 그리는 내용 등 항일 저항가로 뿌리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노래는 ‘독립군 아리랑’이나 ‘광복군 아리랑’에서처럼 기존 아리랑 가락에 반일과 저항의 정서를 담은 가사를 붙인 것들이었다.

아리랑은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창작되었다. 조선족 예술가들이 창작한 아리랑은 195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그 종류만도 무려 50여 종에 이른다. 창작 아리랑의 가창 방식은 민요풍과 트로트 등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새아리랑’ ‘장백의 새아리랑’ ‘아리랑 연곡’ ‘아리랑 정가’ ‘내 고향 아리랑 총각’ ‘연변 아리랑’ ‘청도 아리랑’ 등은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주 1세대가 지켜온 전통 민요 아리랑이 사라진 공간에는 귀향 의식이 비교적 약한 이주 3세대와 4세대의 새로운 가치관이 반영된 아리랑이 자리를 메웠다.

아리랑으로 대변되는 조선족의 정서는 가극과 연극, 문학, 드라마,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아리랑을 통해 조선족 예술의 위상을 드높인 계기가 된 작품은 1991년 가극 <아리랑>과 2006년 대형 음악 무용시 <천년 아리랑>이었다. 특히 2006년 9월 ‘제3회 전국 소수민족 문예 공연’에 참가해 최고대상을 받은 연변 가무단의 <천년 아리랑>은 조선족의 삶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가무극으로 베이징과 창춘 등 공연하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천년 아리랑>이 성공을 거두자 2007년부터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천년 아리랑>을 ‘가무의 고향’ 연변의 관광 브랜드로 삼고 경제·사회 발전 전략의 하나로 추진하기 위해 ‘문화강주’ 계획 속에 포함시켰다. 요즘 논란이 되는 중국의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유산 지정도 실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최근 들어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 3성에 주로 거주하던 1백90만명의 조선족 가운데 50만명은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떠나고, 남아 있는 조선족은 중국의 경제 발전에 따라 하이난 성에 이르는 S자 모양의 해안선 도시 지역으로 흘러나갔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이 30%대로 떨어지면서 조선족 자치주가 폐지될 조짐까지 나타나자 아리랑의 전승 또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족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중국 정부가 아리랑을 비롯한 판소리 등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조선족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집단 거주지가 무너지면서 도래하는 민족 문화의 위기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 처절한 여정에 식민지 백성의 한 가득,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진용선 제공

만주 땅을 통해서, 또는 바다를 건너서 러시아에 들어간 식민지 조선의 백성은 자신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들은 연해주와 사할린 등지에서 살다가 1937년 9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스탈린은 강제 이주에 대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한 달 전 지식인과 지도자 등 2천5백여 명을 먼저 간첩 혐의로 체포해 총살했고, 나머지 18만명에 이르는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았다.

고려인은 강제 이주 이후 아리랑에 대해 거의 침묵했다. 민족적인 특성이 진하게 드러나는 노래이기에 부르고 싶어도, 입안에서 맴돌아도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강제 이주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가요는 풍부해지고 아리랑은 숨어들었다. 이는 아리랑의 전승 기반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초래했다. 문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1930년 <빠르라크아르랑이> 이후 1970년 <치르치크 아리랑>이 나올 때까지 아리랑을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문학 작품이나 창작 가요 등이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하지만 고려인은 밖으로 아리랑을 삼갔을 뿐이지 망각과 외면으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스탈린 사망 이후 북한과 한국을 통해 흘러들어온 아리랑을 수용하면서 소인예술단과 가무단, 무용단을 중심으로 아리랑의 맥을 이어갔다. 우리의 정서와는 다른 공간 속에서 녹은 ‘고려인 아리랑’은 다양성을 담은 또 하나의 줄기를 형성해 3세대와 4세대 그리고 그들의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2년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와 11개 독립국가로 나뉘면서 고려인이 사는 중앙아시아에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1993년 고려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중앙아시아에 불어닥친 새로운 차별과 불이익으로 고려인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이산의 길을 떠나거나 ‘고향’ 연해주로 재이주했다. 고려인의 아리랑에는,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처럼 다양하지는 않지만 이산의 고통과 험난한 삶의 자취, 이민족의 설움 등 그 시대를 견뎌낸 이들의 처절한 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1. 1900년대 초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마을 어린이들. 신발도 없이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밝은 표정들이다.2. 1953년부터 1974년까지 러시아 유주노사할린스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려악단 단장 전두한씨와 부인 이병옥씨. 고려악단의 주요 레퍼토리는 아리랑이었다.


▒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들의 노래, 일본 아리랑

아리랑이 일본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90년대를 전후로 일본 외교관의 글과 신문 기사 등을 통해서였다.

아리랑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데는 레코드 산업의 영향이 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을 상품 시장으로 여긴 일본 축음기 회사가 조선인의 유행가와 더불어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 음반을 취입하면서 일본에서도 조선 노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아리랑’의 인기가 지속되자 1930년 3월 빅타레코드사는 김연실의 앨범 <영화소패 아르렁>을 음반으로 발매하면서 조선에서 아리랑 음반 시대를 열었다. ‘아르렁’ 음반은 ‘조선 민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일본에서 여러 장르의 음반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를 촉발했다.

일본에서는 1931년 7월에 가수 고바야시 치오코가 금색가면(金色假面)이라는 데뷔 명으로 부른 첫 음반이 빅타레코드에서 나왔다. 이 음반이 기대 이상으로 팔리자 음반사들은 저마다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가수를 찾아 나섰다. 요코타 료이치, 아와야 노리코, 다카미네 미에코, 스가와라 쓰즈코 등 내로라하는 일본 가수와 연주자들이 아리랑을 취입했다. 또한 조선에서 유명세를 타던 채규엽과 이난영도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 오카 난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냈다. 또 김용환, 박경희, 임동마 등이 부른 아리랑 음반도 일본에서 나왔다. 1930년 초반부터 1945년까지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40여 종의 민요, 신민요, 가요, 연주곡 등의 음반이 일본에서 발매될 만큼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3. 1930년대부터 그림과 사진을 배경으로 아리랑 노랫말이 담긴 엽서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다.4. 민단계와 조총련계로 나뉘어 있던 재일동포 사회를 하나로 만들자는 취지로 1985년에 처음 시작된 원코리아 페스티벌. 재일동포의 통합은 물론 남북과 해외동포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5. 정선아리랑을 배우기 위해 해마다 정선을 방문하는 일본 호소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정선 고교생과 어울려 정선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아리랑으로 촉발된 관심은 조선 문화 전반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조선 여행이 유행처럼 번져 음반과 책뿐만 아니라 엽서와 홍보물에도 아리랑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조선 풍속, 기생의 사진이나 그림을 배경으로 아리랑을 담은 엽서만도 50여 종에 이르렀다. 한글과 일본어로 된 아리랑 가사가 실린 이 엽서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아리랑이 얼마나 크게 유행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인 강제 징용은 일본 아리랑의 또 다른 뿌리이다. 강제로 일본 땅에 끌려온 조선의 노동자나 위안부가 부른 애절한 정서의 아리랑도 일본인에게 가사와 가락을 자연스럽게 심어주었다. 일본에 잡혀 온 조선인은 그들의 슬픔을 아리랑으로 달랬고, 일본인들은 자연스럽게 이 멜로디를 받아들였다.

광복 후 6·25 전쟁 시기 유엔군의 보급 기지로 산업 전반에 걸쳐 특수를 누리면서 일본에서는 다양한 아리랑 SP 음반이 상품으로 나왔다. 일본의 음반 제작자들은 유엔군의 기호에 맞춰 맞춤형 음반을 제작해 판매했다. 참전 군인이 한국에서 들은 아리랑을 ‘아디동(Ah-Dee-Dong)’이나 ‘오디동’으로 발음하자 음반 레이블에 ‘오디동(O Dee Dong)’이라는 부제를 달거나 아예 영어로 부른 ‘The Song of Arirang’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일본에서의 아리랑은 민단과 조총련을 중심으로 한 아리랑, 일본 가수가 부르는 아리랑, 한국과 북한에서 흘러든 아리랑 등이 경쟁적으로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 시기였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아리랑이 대중가요나 연주곡으로 끊임없이 창작되고 있다. 아라이 에이치(新井英一) 등 일본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가수도 자신이 창작한 가요에 ‘아리랑’의 정서를 담아 부르고 있다. 이들 외에도 1980년대 이후 아리랑이 일본에서 트로트, 록, 재즈 등으로 창작되어 연주된 사례는 일일이 다 찾아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한편 한국전쟁이라는 참변은 영어 문화권에 아리랑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국전쟁 참전 위문 공연을 왔던 재즈의 대가 오스카 페티포드는 한국인이 부르는 아리랑을 ‘아디동 블루스’라는 이름으로 1952년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재즈계의 거성인 찰스 밍구스(베이스)도 참여했는데, 찰스 밍구스는 1980년대에 발매한 자신의 베스트 앨범에 이 노래를 다시 수록하기도 했다. 포크록의 대가 피트 시거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57년 ‘Ariran’을 담은 앨범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4대 아리랑
종류 특징 대표 가사 후렴
아리랑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노래이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민족사의 증언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선아리랑  느린 가락과 빠른 가락이 조화를 이루어 산간 지역의 소박한 정서를 구성지게 표출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진도아리랑  최고음과 최저음의 폭이 크고  마디마디 힘차게 넘어가는 장중한 맛이 일품  문경 새재는 왠 고갠가  넘어올 적 넘어갈 적 눈물이로구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밀양아리랑  세마치장단의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주로 유희의 현장에서 흥겨움을 동반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잘 넘어 간다


▒ 아리랑, 민족 정체성 확인하는 정서의 가락

아리랑이 중국과 러시아, 일본에 스며든 지 100년이 훨씬 지났다. 1860년대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발적인 이주, 강제 이주 등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이주는 아리랑의 분포 공간을 넓혀놓았다.

조선족으로, 고려인으로, 재일동포로 살아가는 이들이 부르는 아리랑에는 분명 우리와는 다른 삶의 양식이 투영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변이’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각기 다른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이들이 풍토가 다른 문화 환경에 적응하며 만들어낸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삶에서 아리랑은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화와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는 틀로 활용되며 생활 주변에서부터 문학예술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성하게 쓰이고 있다.

국경을 넘은 아리랑은 그저 단순한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고난의 행보 속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정서의 가락이다.
은근과 끈기를 담은 아리랑이 지금도 무시로 울리고 있다.
 

*진용선은 강원도문화재전문위원으로 아리랑의 해외 확산, 특히 중국과 옛 소련 지역, 일본과 미주로 전파된 아리랑의 현지 수용과 전승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정선아리랑> <중국 조선족 아리랑 연구>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연구>  <일본 한인 아리랑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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