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축구’ 패인은 ‘밑그림’ 부족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1.08.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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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던 ‘조광래호’가 삿포로의 비극에서 반추해야 할 것들

▲ 지난 8월10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돔에서 열린 한ㆍ일 국가대표 축구팀 친선 경기에서 김신욱 선수(왼쪽)가 슛을 실패한 뒤 안타까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삿포로돔에 울린 심판의 경기 종료 휘슬과 동시에 한·일 양국의 희비가 엇갈렸다. 지난 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전 이후 7개월여 만의 재대결이었다. 당시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우승에 실패한 한국은 복수를 다짐했지만, 경기 결과는 0-3 패배였다. 지난 1974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기전에서 당한 1-4 패배 이후 37년 만에 당한 세 골 차 패배였다. 조광래 감독은 후반 중반 이후 이미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라운드에 선 선수들은 일본의 유연한 플레이에 농락당하듯 무너졌다. 늘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역대 한·일전 역사에 잊을 수 없는 패배의 기록이 새겨진 8월10일의 밤, 삿포로의 비극이었다.

일본은 준비했고, 한국은 자만했다

▲ 슈팅하는 박주영. ⓒ연합뉴스

0-3 완패는 큰 충격이었다. 객관적인 전력 차 이상의 스코어일 뿐만 아니라 최근 승승장구하던 조광래호의 페이스와도 동떨어진 결과였다. 대표팀은 지난 3월과 6월 홈에서 온두라스, 세르비아, 가나를 차례로 격파했다. 특히 아프리카 최강 가나를 상대로 보여준 뛰어난 경기력은 찬사를 받았다. 반면 일본은 같은 시기 치른 체코, 페루와의 평가전에서 모두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은 일본 언론으로부터 ‘아시안컵 우승에 취해 있다’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런 상반된 분위기는 이번 한·일전을 준비하는 두 팀의 자세를 1백80˚ 다르게 만들었다. 일본은 평가전에서의 졸전 탓인지 한·일전을 앞두고 치밀하게 담금질을 했다. 리그 일정을 소화하는 가운데서도 J리그에서 뛰는 국내파가 소집되어 한·일전이 열리는 삿포로에서 사흘간 합숙 훈련을 가졌다. 이후 유럽파가 모두 소집된 정예 멤버가 다시 사흘간 훈련을 했다. 반면 한국은 준비 과정에서 치밀하지 못했다. 유럽파 중 지동원, 이청용, 손흥민이 빠졌다. 박주영은 이적 문제로 팀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국내에서 개인 훈련을 했다. 경기 나흘 전인 8월7일부터 훈련을 했지만 첫째 날은 11명만이 소집되었다. 기성용, 차두리는 9일 일본 현지에 합류해 단 하루 훈련하고 경기에 나섰다. 이 차이는 그라운드 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은 유럽파와 국내파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냈지만 한국은 불협화음이 계속되었다. 기술과 조직력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한국이 우위를 점했던 체력과 투쟁심에서도 일본이 앞섰다.

준비 부족만이 아니었다. 조광래 감독의 자충수 역시 패인으로 작용했다. 조광래 감독은 부임 후 15회의 A매치에서 9승4무2패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유달리 일본에 약하다. 일본과 세 차례 맞붙어 무승부, 승부차기 패 그리고 이번 대패를 기록했다. 공식 기록상으로 2무1패이다. 앞선 두 경기에서도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내용에서는 일본에 뒤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조광래 감독은 나름으로 대비했다. 소속팀 적응에 대한 배려(지동원)와 부상(이청용)으로 빠진 두 핵심 선수의 빈 공백을 이근호와 구자철로 메웠다. 일본의 빠른 패스플레이를 차단하기 위해 신예 이재성을 센터백으로 투입했다. 이 변화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근호는 왼쪽 측면에서 이렇다 할 돌파도 슈팅도 보여주지 못한 채 후반 6분 김보경으로 교체되었다. 원래 미드필더지만 윙포워드로 투입된 구자철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후반의 결정적인 두 차례 기회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젠 한국이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 축구 상대해야

▲ 조광래 감독 ⓒ연합뉴스

23세의 젊은 수비수 이재성은 수비 라인이 흔들리는 단초가 되었다. 현재 이재성은 소속팀 울산에서 주전 선수가 아니지만 조광래 감독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고 투입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고 파트너인 이정수와의 호흡도 문제점을 보였다. 정작 울산에서 주전으로 활약 중인 K리그 최고 수비수 곽태휘는 벤치에만 있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보고 젊은 선수를 적극 기용하는 조광래 감독의 고집은 아집이 되고 말았다. 현실 감각 없이 너무 멀리만 본 선수 기용이 결국 일본전에서 화를 부른 것이다. 게다가 한국이 일본전의 필승 전략으로 삼던 전진 압박과 전방 압박(포어체킹)은 경기 내내 실종되었다. 기술적인 패스플레이를 이유로 조광래 감독이 외면한 재빠른 측면 공격수, 최전방의 파괴력 있는 스트라이커의 부재는 한·일전 패배로 이어졌다. 전임 허정무 감독은 이런 한국 축구의 강점을 활용하며 한·일전에서 2승1무의 우위를 점했다. 조광래 감독의 축구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좁혀야 하는 숙제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날 경기는 조광래 감독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현재 K리그 1위를 달리는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다. 경기 운영 방식에서 오는 경기력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대표팀만이 아니라 클럽 간 경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감독 개인이 아닌 한국 축구 전체의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1990년대부터 한국과의 격차를 좁히기 시작했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에는 각급 대표팀 간 맞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업그레이드되며 양상은 뒤집혔지만, 최근 들어서는 다시 일본이 앞서가는 형국이다. 일본은 대표팀에 명성 있는 외국인 감독을 꾸준히 앉혔고 그들은 ‘더 이상 일본의 경쟁자는 한국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일본 축구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삿포로의 비극은 20년간 투자한 결실의 차이이지 하루아침에 벌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 일본은 장기인 기술과 패스 중심의 축구에 외국인 감독과 유럽파의 경험을 덧입혀 강한 축구로 거듭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지금에서야 기술과 패스를 강조하며 오히려 일본 축구를 쫓아간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최강희 감독은 “한·일전 한판으로 조광래 감독 축구의 현실과 한계가 모두 드러났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우리가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 축구를 상대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가 왔다”라며 상대를 인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한·일 ‘유럽파’들의 활약 차이도 승패 갈랐다?

이번 평가전에서 두드러진 또 하나의 문제점은 유럽파의 활약 차이였다. 박지성의 대표팀 은퇴 후 한국은 박주영(모나코)을 중심으로 새로운 판짜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박주영은 이적 문제로 인해 올여름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고, 이날 경기에서 존재감을 전혀 나타내지 못했다. 소속팀에서 확실한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한 구자철(볼프스부르크), 차두리(셀틱), 박주호(바젤) 등도 활약이 미진했다. 기성용(셀틱)은 주말 리그 경기를 풀타임 소화하고 온 탓인지 활력이 없어 보였다. 지동원(선덜랜드), 이청용(볼턴)의 공백도 커 보였다. 반면 일본은 혼다 케이스케(CSKA 모스크바), 카가와 신지(도르트문트), 하세베 마코토(볼프스부르크), 우치다 아쓰토(샬케) 등이 핵심다운 역할을 해주었다. 카가와는 2골, 혼다는 1골을 책임지며 한국을 무너뜨렸다. 일본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등 각지에 흩어진 한국의 유럽파와 달리 독일 분데스리가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 축구의 발전 과정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독일 무대로 젊은 재능이 다수 진출했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며 꾸준히 경기력을 쌓아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연봉, 리그 규모와 같은 부분에서 견해차를 보이며 분데스리가를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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