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서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자손 기구한 ‘유랑 일생’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1.08.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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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6번째의 광복절을 맞았지만,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의 삶에는 여전히 ‘광복’의 빛이 들지 않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왕산로(旺山路). 서울 동대문에서 신설동을 거쳐 청량리 로터리에 이르는 6차선 도로의 이름이다. 서울 강북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왕산로는 ‘서울 진공 작전’으로 알려진 정미의병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의 호를 딴 것이다. 1908년 당시 결사대 3백명을 이끌고 서울 탈환에 나섰던 허위 선생이 진격 루트로 삼았던 길이 바로 왕산로이다. 왕산로의 서쪽 끝은 종로와 맞닿아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종로3가 낙원상가에 이르게 된다. 낙원상가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허름한 여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취객들과 연인들로 번잡한 이 골목의 한 여관방이 허위 선생의 장손녀 허로자 할머니(85)가 현재 기거하고 있는 곳이다.

허할머니는 지난 1월12일 85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2006년 그의 애달픈 사연이 국내에 알려진 후 5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5년은 허할머니에게 지난 80년의 해외 떠돌이 삶만큼이나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었다. 할머니는 독립유공자로서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조부가 목숨을 걸고 지킨 대한민국과 ‘투쟁 아닌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허할머니는 지난 2005년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을 세 번이나 찾아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후 할머니에게 대한민국은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할아버지의 나라’일 뿐이었다.

허할머니가 국적 회복의 꿈을 다시 갖게 된 것은 2006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한총리의 특별 초청 형식으로 같은 해 80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되면서 허할머니의 꿈은 점차 현실화되는 듯했다. 언론은 연일 허할머니와 관련한 보도를 쏟아냈고, 허할머니의 국적 회복을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약속도 이어졌다. 당시 허할머니의 방문을 도왔던 윤덕호 다큐멘터리 감독은 “노무현 정부 당시 각 부처 장관들이 앞다투어 허할머니를 만났고, 한명숙 총리와  박유철 보훈처장이 허할머니에게 ‘한국 국적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만 하시라’라고 말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국적 회복 신청자 44.2%가 ‘불허·보류’돼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허할머니는 2007년 법무부에 귀화 신청을 냈지만 생각지도 못한 불허 판정을 받았다. 허할머니가 낸 증빙 서류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허형’이라고 나와 있는데, 국가보훈처 자료에는 ‘허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렵사리 비행기 삯을 구해 한국에 들어왔던 허할머니는 하릴없이 귀국 45일 만에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감독은 “독립투사들이 신분을 숨기기 위해 다양한 가명을 사용했다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이다. 불허 판정은 보훈처의 무관심과 행정 편의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보훈처의 슬로건이 ‘찾아가는 보훈 서비스’인 것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에도 정부의 자료 증빙 요구는 계속되었고, 귀화 심사는 해당 부처인 보훈처와 법무부를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영주 귀국(국적 회복) 심사 현황’에 따르면 영주 귀국 제도가 생겨난 1990년부터 2007년까지 국적 회복을 신청한 1천2백14명 가운데 무려 44.2%인 5백37명이 불허 내지 보류 판정을 받았다. 허할머니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허로자 할머니의 귀화를 도운 9촌 조카 허벽씨는 “다리가 불편한 고모를 업고 법무부를 한 달에도 수차례 들락거려야 했다”라면서 “고모도 이럴 바에는 차라리 귀화를 포기하려고 했다”라고 회상했다.

귀화 신청서가 접수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2009년 11월이다. 귀화허가증을 받는 데는 다시 1년이 걸렸다. 국적이 회복되어 꿈에 그리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것은 지난 1월이 되어서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도 역시 녹록지는 않았다. 정부가 지원하는 아파트가 마련되는 오는 10월까지 한국에서 지낼 마땅한 거처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할머니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편까지 예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조국을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이것이 허할머니가 지금 낙원상가 여관 골목에 살고 있는 이유이다.

허할머니에게 여관 생활은 낯설지 않다. 지난 2010년 11월 귀국했을 당시에도 3개월가량을 여관에서 기거했다. 현재 머무르고 있는 여관에서도 벌써 2개월을 보냈다. 친척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할머니를 받아준 친척들 역시 중국 등지에서 살다 최근 국적 회복을 한 이들이다. 경제 상황이 좋을 리 없다. 허할머니는 친척들에게 짐이 되기보다는 여관 생활을 선택했다. 하지만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낯선 땅에서 홀로 여관 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할머니는 스탈린의 소수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왼쪽 다리에 동상을 입었다. 허할머니가 열두 살 되던 해의 일이다. 20대 중반에 수술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후유증이 찾아왔다. 걷기는 물론 다리를 굽히기도 힘겹다. 이 때문에 허할머니가 기거하는 여관방은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1층 카운터 뒤이다.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 없으면 못 버텼을 것”

끼니는 슈퍼에서 사온 빵과 우유로 해결하곤 한다. 그나마 아침·저녁 두 끼뿐이다. 날씨도 고역이다. 허할머니가 살아온 우즈베키스탄은 한국보다 덥다. 그러나 습도는 훨씬 낮다. 허할머니는 선풍기밖에 없는 여관방에서 매일 아침 땀에 흠뻑 젖어 깬다고 한다.

외로움은 최대의 고통이다. 여관 골목에서 초라한 할머니에게 말벗이 되어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또한 허할머니는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 원활한 의사소통도 힘들다. 80여 년을 타국에서 살아온 허할머니에게 ‘고려말’보다 ‘러시아말’이 편한 것은 당연하다.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허할머니가 조국에 머무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보여준 허울뿐인 조국의 무관심과 냉대는 진절머리가 날 만하다. 수구초심이라고 하지만 허할머니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 아니다.

허할머니와 한국을 연결해주는 끈은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 허학 선생은 독립의군부 사건을 주도했으며, 부친인 허위 선생이 옥사하자 중부(仲父)인 허겸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한 항일 투사이다. 그러나 허할머니에게 허학 선생은 독립군 이전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버지이다. 허할머니에게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은 너무나도 적다. 허학 선생은 허할머니가 열 네 살 되던 해 스탈린의 소수 민족 말살 정책으로 54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허할머니는 “아버지는 의지가 강하셨던 분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라면서 “집에서는 반드시 고려말을 쓰도록 하셨다. 고려의 문화를 지키는 것이 또 다른 독립운동이라고 늘 강조하셨다”라고 회상했다.

아버지의 죽음 후 허로자 할머니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제적 궁핍은 물론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허할머니는 “고통과 눈물의 세월이었다. 행여 꿈에서라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라면서 “아버지가 조국을 위해 몸 바치셨다는 자부심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귀화를 마음먹은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허할머니는 “아버지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효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 나라에 ‘아버지의 혼’을 심고 싶다”라고 말했다.

허할머니는 지난 8월9~10일 대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와 구미에 위치한 ‘왕산 허위 기념관’을 둘러보고 왔다. 허할머니는 이 두 곳에 아버지를 기념할 수 있는 조그만 비석이라도 만드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로 귀화 신청할 독립유공자들은 차라리 북한에 귀화한 후 탈북해라?
독립유공자 울리는 보훈처와 법무부의 편협한 행정 편의주의 실태

허로자 할머니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국가보훈처와 법무부의 늑장 심사와 행정 편의주의적 태도는 해외 독립유공자들에게 또 다른 유리 장벽이 되고 있다. 독립유공자들이 귀화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지 대사관에서 귀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또한 국내로 입국해 90일 이상 체류하려면 외국인 등록증을 받아야만 한다. 귀화 심사가 보통 10개월에서 1년가량의 시간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외국인 등록증은 필수이다. 귀화 신청을 하게 되면 기나긴 심사가 기다리고 있다. 허할머니처럼 독립유공자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보류 판결이 내려질 경우 2~3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기간 동안 귀화 신청자들은 자비를 들여 의식주를 해결해야만 한다. 중국,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들이 이를 감당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신청자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여관이나 쪽방을 전전하는 생활을 견뎌내야 한다.

이들이 귀화 신청 후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독립유공자가 맞다”라는 판단이 내려질 경우라도 국내에 머무르고 있지 않으면 귀화 불허 판정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연장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최악의 경우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귀화 허가를 받아도 문제가 다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국내 정착을 돕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없다 보니 적응에 실패하고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독립유공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허할머니의 사촌인 허 게오르기, 허 블라디슬라브 씨의 경우 2006년 단 15일 만에 특별 귀화 허가를 받았다. 정착금으로 4천만원을 지급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은 여기까지였다. 결국 이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1년 만에 자신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버렸다. 허할머니를 돕고 있는 윤덕호 다큐멘터리 감독은 “북한을 탈북한 사람들에게는 정착금과 월 생활비, 임대아파트를 지급하고 한국에서 적응하도록 교육까지 시켜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귀화를 신청할 독립유공자들은 차라리 북한에 귀화한 후 탈북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게 나을 것이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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