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투표 결과, ‘늪’ 될까 ‘길’ 될까
  • 김형구│세계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1.08.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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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시장이 놓은 ‘덫’에 여야 모두 걸려든 형국…딜레마에 빠진 한나라당 “이겨도 골치 아픈 상황”

▲ 오세훈 서울시장이 8월12일 서울시청에서 주민투표 실시와 관련한 기자회견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0세부터 무상 보육’을 주장하는 정당이 ‘무상 급식은 망국적 주장’이라며 주민투표를 통해 저지하자니 우리 국민들께선 어떻게 생각하실지….” 권영세 한나라당 의원(서울 영등포 을)이 지난 8월7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불을 지른’ 전면 무상 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놓고 곤혹스러운 한나라당의 처지가 엿보인다.

서울시 유권자 2백79만명을 향한 ‘고지전’이 한창이다. 승산이 불투명하지만 과감하게 ‘선전 포고’를 한 장수는 오세훈 시장이다. ‘반(反)포퓰리즘 성전’을 기치로 칼을 빼든 것이다. 전투의 승자와 패자는 오는 8월24일 선명하게 갈린다. 서울시교육청이 의결한 친환경 무상 급식 조례와 관련해 서울시 유권자의 견해를 묻는 주민투표가 이날 치러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는 올해부터, 중학교는 내년부터 전면적으로 할 것인가’를 묻는 주민투표이다.

결국은 ‘33.3%’의 싸움이다. 주민투표법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를 해야 투표함을 개봉할 수 있고, 과반수가 찬성하면 안건을 통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단 투표함을 열어보기 위해서는 서울시 유권자 8백36만명 가운데, 2백79만명 이상이 투표장에 나와야 한다.

주민투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야 간 대치 전선이 뚜렷해지고 있지만, 이를 둘러싼 복잡한 기류도 분명히 감지된다. 각자의 ‘정치 셈법’이 확연히 달라서다.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오시장이 놓은 ‘덫’에 여야 모두 빠진 형국이다. 일단 오시장은 정치 생명을 몽땅 걸었다. 그는 지난 8월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주민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2012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차기 대선 불출마’를 공식화함으로써 주민투표를 ‘대권 행보’와 연관시켜 보는 시각을 차단하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투표 불참 운동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승부수이다. 시장직 진퇴와 관련해서는 “한나라당과 더 깊은 논의를 선행해야 한다”라며 즉답을 회피했지만 여지를 남겨두었다. “시민의 뜻을 묻고 당과도 긴밀히 협의한 끝에 입장이 서면 투표 전에 입장을 밝힐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주민투표에 임박하는 시점에서 ‘시장직 진퇴’ 카드를 다시 꺼내들어 투표 참여 열기에 기름을 부으려는 계산이 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오시장의 ‘결기’에 한나라당도 전열을 정비하고 ‘지원 사격’을 한층 강화했다. 한나라당 서울시당 위원장인 이종구 의원은 “오시장의 진정성이 전달되어 주민투표 열기가 뜨겁게 고조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나경원 최고위원도 최근 지원군을 자원했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성전에 오시장이 혼자 싸우도록 놔두는 것은 맞지 않다”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지난 8월8일부터 서울시당을 통해 서울 시내 곳곳에 ‘무상 급식, 세금 폭탄으로 돌아온다’라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을 내거는 등 주민투표 독려 활동에 당력을 쏟고 있다.

▲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 앞 사거리에 서울시의 무상 급식 주민투표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기자와 만나 “한나라당 내 ‘침묵하는 다수’는 주민투표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라고 전했다. 투표율 33.3% 달성 가능성에도 상당수가 회의적이라고 한다. “투표일이 무더위가 한창인 평일인데 자기 돈으로 급식비를 내겠다며 투표장에 가는 유권자가 얼마나 되겠느냐”라는 것이다.

설사 주민투표에서 이기더라도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단계적 무상 급식’ 안이 통과되어 당장 올 하반기부터 급식비 청구서가 각 가정에 날아들면 서민들의 ‘체감 피해 의식’만 더 커질 것이고, 이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 심판 정서에 불을 댕길 수도 있다는 관측에서다. 오시장의 잠재적 대권 경쟁 주자인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최근 일본 도쿄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미 지난 3월부터 무상 급식이 실시되고 있는데 (무상으로 밥을) 줬다가 빼앗으면 더 문제가 아니냐”라는 것이다. “주민투표가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도 했다.

“오시장은 패해도 나쁠 것 없다” 분석도

한나라당의 딜레마는 또 있다. 무상 급식 반대 방침이 황우여 원내대표가 지난 8월7일 꺼내든 ‘0?4세 무상 보육’ 카드와 배치되는 것으로 비친다는 점이다. 권영세 의원이 트위터에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라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오시장 때문에 한나라당이 늪에 빠져들고 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주민투표 불참 운동을 펴는 민주당도 고민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당초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려 했던 민주당은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자 대응 수위를 중앙당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보수와 진보의 일전’으로 치달을 조짐이 보이자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민주당은 다른 야당 및 시민단체와 함께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편 가르는 나쁜 투표 거부 시민운동본부’를 꾸리고 ‘총력전 모드’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민주당 서울시당 차원에서도 지난 8월7일부터 시내 곳곳에 ‘서울시는 주민투표 중단하고 수해 복구 전념하라’ 등 투표 불참을 독려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지만 중앙당 차원에서 너무 깊이 개입하면 오시장이 주도하는 싸움에 말려들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당은 거듭 신중을 기하고 있다.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향후 정국이 어떻게 요동칠지 여부를 놓고 여야 각 진영의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도 요란하다.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서는 오시장은 물론 여야 모두 명운을 뒤흔들 만큼 큰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우선 투표율이 33.3%를 넘기고 서울시가 주장하는 단계적 무상 급식 실시안이 통과되면, 오시장은 ‘꽃가마’를 타게 될 것이 자명하다.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내년 대선 레이스에서 ‘오세훈’을 불러내는 목소리가 커지면 상황은 지금과 1백80° 달라질 수도 있다.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 독주’ 현상에 대한 견제론을 타고 오시장이 일약 거물급 대권 후보로 부상할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시장은 이미 ‘사즉생(死卽生) 전법’으로 2006년 서울시장 자리에 오른 인사이다. 16대 국회의원 시절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 처리를 주도한 뒤 17대 총선에 불출마하는 승부수를 던져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당선된 것이다.

개표 결과 단계적 무상 급식 실시안이 부결되거나, 투표율 미달로 투표함을 아예 열어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오시장으로서는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당장 사퇴 여론이 쇄도할지라도, ‘정치인 오세훈’은 야당의 무상 복지 시리즈에 전면적으로 맞서 싸운 ‘보수의 아이콘’으로 각인될 수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오시장이 장렬하게 ‘전사’하는 이미지를 남기면 내년 대권 레이스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수도 있다”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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