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달려온 두 야구 천재의 운명
  • 박동희│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1.09.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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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장효조·최동원의 ‘프로 인생’

▲ 1983년 롯데에 입단해 활약을 펼쳤던 최동원 선수. ⓒ연합뉴스

“충격이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낙천적인 허위원이 비탄에 잠긴 이유는 간명했다. “올 시즌 프로야구가 6백만 관중을 돌파했다. 하지만, 6백만이 사랑했던 프로야구의 두 거목을 잃었다. 기쁨과 슬픔이 이렇게 동시에 교차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허위원이 말한 ‘두 거목’은 고 장효조 삼성 2군 감독과 고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을 가리킨다. 실제로 야구계는 ‘타격 천재’ 장효조와 ‘투수 천재’ 최동원을 일주일 사이로 떠나보내고 망연자실해 있다. 타자와 투수로 서로의 포지션은 달랐으나, 삶의 궤적만은 동일했던 두 야구 거목을 <시사저널>이 돌아보았다.

“천재였다. 타격에서는 나도, 이승엽도 범접할 수 없었다.” 이만수 SK 감독대행은 대구상고(현 대구 상원고) 선배이자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장효조를 그렇게 평가했다. 이감독대행만의 평이 아니다. 원로 야구인들은 하나같이 장효조를 ‘천재’라고 부른다. 과장이 아니다.

1973년 대구상고 2학년생이던 장효조는 봉황대기와 황금사자기에서 타율왕에 올랐다. 상대 투수들이 “던질 데가 없다”라고 하소연할 정도로 그는 어느 코스에 공이 와도 안타로 연결했다. 그해 서울에서 열린 한·일 고교야구 친선대회에서는 고시엔 대회에서 노히트노런 9회, 퍼펙트 경기 2회를 달성한 ‘괴물 투수’ 에가와 스구루를 상대로 손쉽게 안타를 뽑아냈다. 당시 일본 취재진이 “한국 고교생 가운데 저렇게 타격 기술이 뛰어난 타자가 있는지 몰랐다”라며 혀를 내두른 것은 야구계에 유명한 일화이다.

한양대 시절에도 천재성은 여전했다. 1976년 백호기대회에서 장효조는 7할1푼4리라는 거짓말 같은 기록으로 타율왕에 올랐다.

프로에서는 더 잘했다. 1983년 삼성에 입단한 장효조는 그해 5월10일 대구에서 열린 OB(두산의 전신)와의 경기부터 15일 대전에서 열린 OB전까지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에 성공했다. 그 여세를 몰아 장효조는 타율 3할6푼9리로 입단 첫해 타율왕에 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1985부터 1987년까지 3년 연속 타율왕에 올랐고, 1989년까지 데뷔 이후 7년 연속 타율 3할을 기록했다. 특히나 1987년에는 타율 3할8푼7리로 정규 시즌 MVP에 오르며 이른바 ‘장효조 시대’를 열었다. 장효조의 개인 통산 타율 3할3푼1리는 지금도 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다.

“타고난 투수였다. 속구는 총알보다 빨랐고, 제구는 송곳이었다. 천재도 그런 천재가 없었다.” 박철영 SK 스카우터는 연세대 선배이자 국가대표에서 배터리를 이루었던 최동원을 그렇게 회상했다. 이 역시 과장이 아니다. 최동원은 야구를 위해 태어났고, 야구는 그 때문에 빛이 났다.

최동원은 부산 토성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학 투수를 능가한다’라는 평을 들었다. 연습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밥 먹듯이 기록했고, 27타자 가운데 24타자를 삼진으로 잡기도 했다. 부산 경남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5년 전국 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는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이틀 후 열린 선린상고전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 기록을 이어갔다. 17이닝 노히트노런 기록은 한국 야구사에 유일무이한 대기록으로 남아 있다.

연세대에 가서도 최동원의 전설은 이어졌다. 당시 동국대 4번 타자였던 김성한 전 KIA 감독은 “최동원을 상대로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 하나 쳐보는 것이 모든 대학 타자들의 꿈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최동원의 공은 위력적이었고, ‘탈(脫)아마추어’적이었다.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는 등 호투를 펼치며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히자, 미국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최동원에게 연봉 61만 달러를 제시하며 입단을 제안했다. 병역 문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미국 메이저리그가 한국인 선수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83년 롯데에 입단한 최동원은 이듬해 27승을 따냈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혼자 4승을 거두며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프로야구 사상 입단 이래 5년 연속 2백 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는 지금도 최동원뿐이다. 그가 ‘강견’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천재’ 소리를 들었던 장효조와 최동원이었지만, 타자와 투수라는 포지션의 상이함 때문에 공통점은 적었다. 그들의 공통점이 나타난 것은 은퇴 후부터였다.

선입견의 희생양이 되었던 ‘두 거목’

▲ 장효조 선수는 1983년 삼성에 입단하자마자 첫해 타율왕에 오르며 ‘장효조 시대’를 열었다. ⓒ연합뉴스

“장효조와 최동원처럼 대스타 출신 야구인이 어째서 감독이 못 되는지 아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성격 때문이다.”

2009년이었다. 모 구단 단장은 당시 야인으로 있던 장효조와 최동원을 지칭하며 혀를 찼다.

야구계는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을 ‘이기적인 야구인’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이것이 정설처럼 굳어졌다. 사실 여부는 판단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이 혹평 때문에 지도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지 못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생전 장효조와 최동원은 이같은 평에 반발했다. 장효조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구단이 나를 비난하면 몰라도 같은 야구인끼리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느냐”라고 억울해했다.

“삼성에 있을 때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마찰이 있었다. 내 연봉을 더 많이 받겠다고 싸운 적은 없었다. 고참이고, 팀의 간판인 만큼 내가 연봉 협상을 잘해야 동료와 후배가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구단과 대립각을 세웠다. 선수의 복지와 권익 문제를 다룰 때도 선수 입장을 구단에 전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장효조가 동료를 이용해 자기 연봉을 높이려 한다’라는 근거 없는 비난이었다.”

생전 최동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고액 연봉자일 때 2군 선수는 6백만원도 안 되는 연봉으로 살아갔다. 2군 선수 밥상에 김치와 국물만 나오는 것도 숱하게 보았다. 프로야구 선수라면 연봉 차는 있어도, 비슷한 인격적 대우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수회’를 만들려고 했고, 연봉 협상 때마다 구단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구단과의 연봉 협상이 끝나면 꼭 뒷말이 들렸다. ‘최동원은 자기밖에 모른다’라는 소리였다. 구단의 뒷말보다 더 화가 나던 것은,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구단 말만 받아쓰는 기자들이었다.”

장효조와 최동원을 잘 아는 이들은 두 사람이 “절대 이기적이지 않았다”라고 입을 모은다. 이만수 SK 감독대행은 “장선배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했다. 팀에 어려운 동료가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했던 사람이다”라고 회상했다. 박스카우터 역시 “최선배는 한참 어린 후배에게도 말을 놓지 않고, 대학 시절에도 유일하게 체벌을 가하지 않은 선배였다”라고 기억했다.

최동원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야구인은 “결국 장효조와 최동원이 야구계에 좀 더 일찍 돌아오지 못한 것은 구단과 언론이 합작해낸 선입견 때문이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현역 시절 두 사람은 같은 팀에서 뛴 적이 없다. 1989년 최동원이 삼성 유니폼을 입었을 때 장효조는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존경을 나누는 사이’였다.

생전 장효조는 “무서운 투수가 없었다”라고 자신했다.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바로 최동원이었다. “(최)동원이의 몸쪽 속구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무서웠다. ‘잘못 맞으면 죽겠다’ 싶었다. 제구가 원체 좋다 보니 실투도 거의 없었다. 정말 상대하기 버거운 투수였다.” 장효조의 진심이었다.

최동원 역시 ‘자신감’ 하면 당대 최고였다. 홈런을 맞으면 같은 코스에 같은 구종을 던져 ‘힘 대 힘’의 정면 대결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장효조를 상대할 때만은 힘보다 기교를 앞세웠다. “몸쪽, 바깥쪽, 위와 아래. 그 어디에도 약점이 없었다. 속구와 변화구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알고 받아쳤다. 이상하리만치 (장)효조형과 맞붙으면 꼭 안타를 허용했다. 그래서 효조형과 상대할 때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많이 했다. 내가 상대한 타자 가운데 가장 힘든 스타일이었다.”

‘천재’로 불렸으나 한때 야구계에서 ‘이단아’로 내몰렸던 두 야구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주일 사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나라에서는 같은 팀 유니폼을 입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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