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제 나아갈 길 분배냐, 성장이냐
  • 소준섭│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11.09.2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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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키’ 쥐고 치열한 논쟁 부른 두 지도자 보시라이와 왕양

▲ 지난 6월29일 중국 충칭의 한 행사장에서 중국 국기를 흔드는 보시라이(왼쪽). 오른쪽은 이탈리아 외무장관을 접견하는 왕양(사진 오른쪽). ⓒEPA연합

중국에서 차기 주석직 교대를 1년 앞두고 두 명의 정치가가 두드러지게 떠오르고 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충칭 시(重慶市) 서기 보시라이(薄熙來)와 광둥 성(廣東省) 서기 왕양(汪洋)이다. 중국 대륙의 서문(西門)으로 불리는 충칭 시의 지도자 보시라이와 중국 남부에 있으면서 경제 성장과 개혁의 핵심 동력인 광둥 성의 지도자 왕양. 지금 보시라이는 정부가 소득의 불균형을 완화시키고 사회 빈곤층에 저렴한 공공 주택을 제공하며, 지원이 필요한 저소득층에게 부를 재분배하는 측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수년 동안 지역 경제의 성장에 앞장선 또 다른 지도자 왕양은 경제 정책은 단순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파이를 나눌 때가 아니라 파이를 키울 때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분배와 복지를 주창하면서 이전 마오쩌둥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과 자유주의 및 성장 일변도 노선을 중시하는 왕양의 ‘광둥 모델’ 간에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논쟁은 향후 중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출발선은 동일했지만 걷는 길은 상이해

광둥 성 서기 왕양은 빈곤 지역인 안후이 성(安徽省)의 노동자 출신으로서 공청단(共靑團: 중국공산당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일찍이 38세에 안후이 성 부성장(副省長)을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중국의 최연소 부성장이었다. 그 무렵 그는 주룽지 총리의 신임을 얻어 국무원에 들어가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근무했다. 2007년 10월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던 그는 그해 12월1일 광둥 성 서기로 발령받았다. 중국 남부의 유명한 경제 성장 기지인 광둥 성을 이끄는 총 지휘자가 된 그는 “우리는 여전히 경제 건설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지금 파이를 나누는 것이 중요 과제가 아니라 아직 파이를 키우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2007년 왕양과 같은 해에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고 그해 11월30일 충칭 시 서기로 부임한 보시라이는, 그 출발선은 왕양과 동일했지만 전혀 상이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보시라이는 차기 주석직이 확실시되고 있는 시진핑의 경우처럼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오쩌둥이나 중국 혁명과 관계 있는 핵심 인물과 연관된 이른바 태자당(太子黨) 계열의 ‘황태자’이다. 즉, 그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는 혁명기의 혁명 원로인 ‘불멸의 8인’ 중 한 명이다.

보시라이는 충칭 시 서기가 되기 전에 상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배짱 있는 담판으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의 장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이전에는 중국 북동부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 다롄의 시장으로 있으면서 ‘다롄의 세 가지 보물’, 즉 ‘다롄 삼보(三寶)’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후 랴오닝 성 성장을 역임하며 낙후된 랴오닝 성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주도함으로써 기업 친화적인 지도자로서 명성을 크게 얻었다.

하지만 그 기업 친화적인 명성은 현재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보시라이는 충칭 시 서기가 되면서 극적인 노선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치국(治國)의 관건은 치관(治官), 즉 관리를 잘 다스리는 데에 있다”라고 강조하면서 대대적인 반(反)부패 운동을 전개했다. 충칭 시는 지금까지 3천명에 이르는 부패 범죄자들을 체포했고, 가라오케를 비롯해 시내 도처에 있던 ‘불건전한’ 유흥업소를 모조리 폐쇄시켰다. 

보시라이가 더욱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지점은 바로 그가 이끄는 충칭 시가 마오쩌둥의 시대를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보시라이는 일반 시민들에게 마오 시대에 사랑받던 이른바 <홍가(紅歌)>를 부르도록 적극 권장해 충칭 시의 공원 어디에서든 시민들이 집단으로 <홍가>를 부르면서 공원을 활보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또 충칭의 각급 학교에서는 27곡의 필수 혁명 가곡을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 어록 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보시라이는 말한다. “우리 다음 세대가 오로지 돈 버는 것에만 빠져 있게 된다면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이러한 보시라이에 대해 중국 사회에서는 지지자와 비판자로 나뉘어 논쟁이 불붙고 있다. 지지자들은 “마오 사상이 충칭에 돌아왔다”라고 반기면서 심지어 “보시라이 정신 만세!”라는 환호성까지 보내고 있다. 반면 비판자들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우민 교육’이고 ‘문화대혁명의 유산이며 독소’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보시라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열렬한 홍위병으로 활동한 바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시라이가 경제 성장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충칭 시 서기에 부임한 직후부터 충칭 시의 경제 성장은 눈부실 정도로 가팔랐다. 2008년 충칭 시의 경제 성장률은 14.3%라는 고도 성장을 보였으며, 2008년 외자 도입액은 무려 1백70%나 급증했다. 2009년 외자 도입액은 40억 달러에 이르러 중국 서부 지역 12개 성시(省市) 중 1위를 차지했다.

시진핑, 공개적으로 보시라이 지지

보시라이와 왕양, 두 사람은 각각 중국 정치의 두 정파인 공청단과 태자당의 대표적인 차기 주자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인물이 자신이 속한 정파의 노선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태자당은 성장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반면, 공청단은 빈부 격차 축소, 고소득 계층 억제, 사회의 균형 발전을 주창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정파의 핵심 주자들인 보시라이와 왕양은 현재 거꾸로 상대측 정파의 노선 및 정책을 열렬히 실천하고 있다. 따라서 성장이냐 분배냐를 선택해야 하는 길목에 서 있는 중국의 앞날은 이 두 사람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미국 에모리 대학 카터 센터의 중국 부문 팀장인 리우 야웨이는 “자유주의자들은 왕양 뒤에 줄을 서고, 골수 마오주의자들은 보시라이를 사랑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작 우리의 관심을 가장 끄는 문제는, 과연 차기 지도자 시진핑이 이 두 사람 중 누구를 선호하고 지지하느냐이다. 그런데 시진핑은 지난해 12월 공개적으로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야심적으로 전개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공공 임대주택 확대 정책과 그의 반부패 투쟁 운동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시진핑이 차기 주석직에 오르게 되면 보시라이가 그의 편에 설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불확실성이 자욱한 중국 정치의 속성상 아직은 인내심을 가지고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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