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경영인인가 정권에 밉보인 희생자인가
  • 김지영·안성모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1.09.2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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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품 제공 폭로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은 누구?

▲ 이국철 SLS그룹 회장은 지난 9월14일부터 15일까지 1박2일 동안 강원도 모처에서 취재진을 만나 SLS 사태와 여권 실세들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시사저널 윤성호

SLS그룹을 이끌어온 이국철 회장(50)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고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주목되었다. 지난 2008년 11월4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무역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질의·응답을 주고받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시 이대통령은 모두 발언에 앞서 이회장에게 “조선 주문 물량이 떨어졌다면서요?”라고 물었고, 이에 이회장은 “그래도 앞으로 3년간 생산 물량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40대 젊은 나이로 중공업과 조선업 부문에서 자신의 회사를 중견 기업으로 이끌었고, 그 밖에도 1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사의 회장에 오른 이국철 회장의 성공담은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공 신화’를 이루기까지 험로를 걸었다. 이회장의 인생 역정은 그가 지난해 11월과 올해 5월 법원에 제출한 두 건의 ‘반성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업 번창하다 신아조선 인수 후 큰 시련

▲ 이회장이 2008년 여름 열린 진수식에서 SLS조선 임직원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국철 회장 제공

이회장의 고향은 대구이다. 1962년 3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대구는 한국전쟁 때 평안도에서 월남한 그의 부모가 정착한 곳이다. 그의 부친은 대구 지역에서 건축과 염색, 부동산, 나일론 사업 등을 하면서 한때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이후 사업 실패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가 대구 대봉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 무렵이었다. 2층 양옥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순식간에 단칸방 신세를 져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5·6학년 여름 방학 때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 칠포리에 사는 친척집에 내려가 지내야 했다. 공교롭게도 포항시 흥해읍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 겨울방학 때는 서울 경동시장 앞에서 누나와 함께 호떡 장사를 하기도 했다. 중학생 때 이회장은 그의 어머니에게 “밥 세끼만 먹여주면 전국 1등을 하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었다. 당장 고등학교 진학 여부부터 고민해야 할 처지였다.

결국 그는 서울에 있는 국립 철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전액 국비로 학교를 다녔다. 고교 2학년 때 철도 동력차 정비 자격증을 최연소로 취득하는 등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고교를 졸업한 1981년 3월 곧바로 서울지방철도청 기능직 9급 공무원으로 취업했다. 10여 년 동안 줄곧 기관차·객차 분야에서 근무했다. 22세 때 최연소 새마을호 기술직 승무원이 되기도 했다.  

직접 사업을 하게 된 것은 당시 철도청 차량국장이던 학교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기로 결심한 그는 1992년 기능직 8급 신분으로 철도청에서 퇴직했다. 처음에는 퇴직금으로 서울 압구정동에서 간판 관련 사업을 하다가, 이듬해 철도 부품 공장인 ‘디자인리미트’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다시 철도 관련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1998년 옛 해태중공업 창원 공장을 인수하면서 철도 차량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그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다. 국내 최초 신형 무궁화 객차를 개발해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2004년에는 국내 및 해외 전동차 시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현대-대우-한진 간의 빅딜 후 ‘로템’이 독점해온 국내 전동차 시장이 경쟁 체제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SLS라는 그룹명은 ‘바다(Sea), 땅(Land), 하늘(Sky)’에서 큰 발자취를 남기는 기업이 되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는 2005년 말 경남 통영에 있는 신아조선을 인수했다. 이로써 SLS중공업(철도 차량 제작 및 공급)과 SLS조선(선박 제작 및 공급) 등을 운영하게 되어 그래도 두 가지 뜻은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조선소 인수로 인해 그는 큰 시련을 맞았다. 분식 회계 의혹으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고, 2009년 9월부터 9개월 동안 대대적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당시 이회장이 썼던 일기를 보면 상당히 힘들어했던 과정이 드러난다. 이회장은 사업을 확장하면서 ‘어떻게 하면 회사를 키울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고 한다. SLS조선의 경우 ‘어떻게 회사를 정상화하느냐’에 중점을 두었다. 검찰 수사가 있던 해인 2009년 새해에 첫 출근을 한 후 그는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이 회사가 이곳까지 왔다.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해 5월 첫째 날에는 ‘그동안 환율과 회사 수익에 대해 태만과 여유를 가진 것 같다. 이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다’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전 재산 사회에 환원” 약속하기도

이회장이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을 보면, “전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당시 이회장의 재산은 약 1조원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아원과 양로원이 함께 있는 사회단체를 각 시에 하나씩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고 기자에게 고백하기도 했다. 또 세계 조선업 1위인 대한민국에 배를 만드는 학과가 없다며, 물류 전문대학을 만들겠다는 꿈도 품었다. 하지만 검찰 수사에 이어 2009년 12월 SLS조선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회장의 부친은 그 충격으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지난해 12월14일 급성 간염으로 별세했다.

 ‘신바람 강의’ 황수관 박사와 이회장 집안의 특별한 인연 

‘신바람 강의’로 유명한 황수관 박사(연세대 의대 교수)는 이국철 SLS그룹 회장 집안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황박사는 대학에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 부잣집에서 가정교사를 지냈다. 대문 큰 집에 무턱대고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분이 이회장의 아버지였다. 열아홉 살 대학 신입생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첫째와 둘째 아들을 가르치게 해주었다. 이회장의 큰형과 둘째 형들이다. 당시 이회장은 학교에 다니기 전이었다.

황박사는 이회장 집에서 1년 반을 지냈다. 대구에서 염색 공장을 운영하던 이회장의 아버지는 숙식은 물론 매달 용돈까지 주면서 황박사를 챙겼다. 황박사는 그 돈으로 시골에 있는 여동생에게 크레파스를 사준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도 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교수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박사는 몇 해 전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이회장 가족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황박사는 나중에서야 이회장의 아버지가 ‘사업이 어려운데 괜히 황박사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라며 만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12월 이회장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들은 황박사는 빈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황박사는 “수십 년 만에 만났는데도 이회장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 아들 중에서도 특히 이회장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선했다. 좋아도 좋은 척, 싫어도 싫은 척을 안 했다”라고 밝혔다. ‘상주’로서 빈소를 지켰다는 그는 “이회장에게 ‘큰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어려움도 있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해주었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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