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채용’ 대신 ‘오디션’으로 뽑는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11.10.1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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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그룹, 최근 새로운 해외 인재 채용 공고 내놓아 / ‘프레젠테이션 채용’ 방식에 일부 유학생들은 당황

▲ 한 대학 캠퍼스에 마련된 대기업 채용 설명회장에서 대학생들이 기업체 관계자들과 상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이 색다른 해외 인재 채용 방식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다른 기업들이 시도하지 않은 인사 정책이어서 그 실효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9월26일부터 콜롬비아 대학, 미시간 대학, 일리노이 대학, 뉴욕 대학 등 미국 유명 대학 한인학생회 채용 게시판에 현대차그룹의 채용 공고가 일제히 올라왔다.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우수한 인력을 미리 낙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 내용은 기존과 크게 달랐다. 10월10일까지 취업 지원서를 접수하는 것까지는 이전 방식과 같았지만, 10월17일까지 발표 자료를 제출하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공계 학생은 연구·개발(R&D), 경영계 학생은 경영 전략(마케팅)을 주제로 발표 자료(MS-파워포인트 10장 분량)를 작성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보내라는 것이다. 취업 지원서와 소개서 등 간단한 서류를 요구하던 기존 방식과 차이가 난다.

현대차그룹은 접수한 논문 자료 중에서 우수한 것을 추려 해당 지원자에게 1차 합격을 통보한다. 1차 합격자들은 오는 11월4~5일 이틀 동안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로 모여야 한다. 그 자리에서 학생들은 논문을 현대차 연구소, 경영전략·마케팅 부서 임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 미국 전역에서 유학생들이 모이는 만큼 항공편과 숙박비는 현대차그룹이 전액 부담한다. 현대차그룹은 ‘현대 글로벌 최고 재능 대회(Hyundai global top talent award)’라는 이름까지 정하고 이를 매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회에 총 2만 달러의 상금도 걸었다.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 대회에서 걸러진 합격자들은 2012년 1월9일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초청되어 현대차 최고 경영진의 최종 면접을 볼 수 있다. 합격이 확정된 유학생에게는 졸업 후 현대차그룹에 입사하는 조건으로 매월 2천 달러의 장학금이 지급된다. 

지금까지 현대차그룹을 포함한 대다수 기업은 미국 대학들을 찾아다니며 채용 설명회를 열어 인재를 채용했다. 학교 내 강의실이나 인근 호텔에 설명회장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기업을 설명하고 지원을 독려하는 일명 ‘캠퍼스 채용’이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현대차그룹이 이를 ‘PT 채용’으로 그 방식을 바꾼 셈이다.

▲ 현대차그룹이 최근 미국 유명 대학의 한인학생회 취업 게시판에 올린 인재 채용 공고 포스터.

현대차그룹 “높아진 기업 위상에 맞춘 선택”

해외 인재 채용이 기업의 장래와 직결되는 요즘, 채용 방식을  바꾸는 일은 기업 입장에서는 모험이다. 현대차그룹이 모험을 하면서까지 채용 방식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기존 캠퍼스 채용 방식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이 작용했다. 구멍가게처럼 채용 설명회장을 만들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모양새로는 기업 입맛에 맞는 인재를 채용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해외 인재 채용 시기에 각 기업의 최고 경영진이 직접 해외 대학을 순회했고, 특히 자신이 졸업한 학교에서는 ‘선배’ 타이틀을 내세워 학생들의 지원을 유도했다. 또 미모가 뛰어난 여직원을 대동하는 이른바 ‘미인계’까지 동원해야 했을 정도로 국내 기업은 해외 유학생들에게 시쳇말로 ‘찬밥’ 대우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인 한 유학생은 “한국 기업의 채용설명회에 10명도 참석하지 않아 썰렁한 적이 있다. 그나마 그 기업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밥 한 끼 먹고 가는 학생이 다수였다”라고 말했다.

이는 한동안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 두뇌 유출)’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한국 기업에 취업해서 고생하기보다는 외국 기업체나 대학 교수 자리를 알아보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대세를 이루었다. 미국에서 2009년에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 박사 학위를 받은 외국인은 전체의 37%에 달했다. 특히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그 비율이 50%를 넘었다. 그해에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 박사 학위 취득자를 국가별로 보면 중국 4천100명, 인도 2천2백63명, 한국 1천5백25명 순이다. 이 덕분에 미국은 유능한 전문 인력을 외국인으로 채워온 것도 사실이다. 미국으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이 석사·박사 학위 등을 취득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잔류함으로써 미국은 자연스럽게 외국인 우수 인재를 충원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경기가 악화되면서 채용 시장도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분위기이다. 고생스럽지만 한국 기업에서 대우를 받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내 기업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미국 동부 명문 대학(아이비리그) 학생들의 태도도 바뀌고 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미국 고용 시장이 악화되면서 국내 기업에 대한 유학생들의 관심도가 꽤 높아졌다. SK이노베이션이 뉴욕 지역에서 연 채용 설명회에 약 3백명이 참석했다. 코넬 대학 등 아이비리그 대학에 있는 학생들의 관심도도 높아졌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유학생들이 지원할 만한 한국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를 뒤집어보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인재를 골라 채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셈이다. 삼성그룹에 버금갈 만큼 위상이 높아진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이런 기회를 적극 활용할 필요성을 느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2위 자리를 굳혔다. 지난해 매출 1백12조5천8백97억원을 기록해 처음으로 ‘매출 100조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그룹 9개 상장사의 순이익은 9조1천6백79억원으로 삼성그룹 13개 상장사 이익(8조1천36억원)보다 많았다. 현대차그룹 출범 이후 처음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말이면 해외에 연간 3백50만대의 생산 기지도 확보한다. 세계 자동차 역사상 가장 이른 시간에 3백만대가 넘는 해외 생산 기지를 구축한 자동차업체가 된다. 국내외에서 생산하는 차가 연간 6백50만대로 도요타·GM에 이어 세계 3위권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고급 인력 흡수하는 데 한계” 지적도

인사 채용 방식에서 현대차그룹은 과거 삼성이나 LG를 따라갔다. 상주 채용 직원(GRO) 제도의 도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외국 현지에 채용 직원을 상주시켜 뛰어난 인재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운 채용 방식을 내놓은 배경에는 독자적인 채용 방식으로 해외 인재를 선점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기업이 몇몇 대학에서만 채용 설명회를 열면, 다른 학교 학생 입장에서는 지원의 기회가 없는 셈이다. 새 채용 방식은 이런 점을 개선했다. 어느 대학에 있든지 모두 지원할 수 있는 기회이다. 또 현대차그룹의 위상도 과거보다 높아졌다. 굳이 찾아가서 기업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올 정도는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의 이런 채용 방식에 대해, 고급 인력을 흡수하는 데에는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황선길 잡코리아 마케팅사업본부장은 “유학생 중에서 최고급 인력을 영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세계 유수의 기업·연구소·학교가 우수 인재를 1 대 1로 접촉하고 관리한다. 그런 인재가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PT 자료를 만들고 먼 곳까지 찾아가서 발표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의문은 이번 현대차그룹의 채용 공고를 접한 학생들의 시각에서도 나타난다.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한 학생은 “박사 과정을 마친 학생이 한 특정 기업만 보고 매달리겠는가. 여러 기업, 학교, 연구소를 비교해서 최선의 길을 찾는다”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또 다른 학생은 “기업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에 입사한다는 조건이 붙기 때문에 몇 년 후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이나 연구소가 나타나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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