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 흘리며 뒷걸음질치는 ‘혁명’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1.10.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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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군부, 집권 야욕 드러내면서 시민들과 충돌…마찰 장기화할 경우 민주화 꿈 물거품 될 우려

지난 9월10일, 수천 명의 성난 군중이 이집트 카이로의 대성당에 모여 전날 밤 보안군과의 충돌로 사망한 코프트(Copt)계 기독교도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번 유혈 사태는 지난 2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한 이래 이집트에서 군과 시민들 간에 일어난 충돌로는 가장 격렬했다. 이 때문에 튀니지의 민주화 혁명과 함께 ‘아랍의 봄’ 소식을 알린 이집트 민주화 혁명이 혹시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면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외신 보도와 정치 분석가들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모든 화근의 발단은 이집트 군부에 있는 것 같다. 이 나라 군부가 당초의 약속대로 신속하게 정권을 민간 정부에 넘겨줄 의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혁명에는 통상 권력 공백과 혼란이 따르고,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특정 집단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집트 군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혁명을 민주화로 이행시키는 데 협조하는 척했다. 그러나 도중에 권력에 대한 탐욕의 덫에 걸렸다. 그래서 민정 이양을 지연시키는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발한 묘책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집트 인구 8천5백만명 중 10%를 차지하는 소수의 코프트계 기독교도와 나머지 90%에 달하는 다수의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을 이용하는 것이다. 두 종파 간 충돌을 조장해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이를 핑계로 민정 이양을 지연시키는 술책이다.  

▲ 지난 9월10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시민들이 모여 전날 보안군의 유혈 진압으로 희생된 시민의 관을 옮기며 분노하고 있다. ⓒEPA연합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 이용한 듯

군부의 흉계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몇 달 전부터 기독교 교회에 대한 무슬림들의 공격이 자주 발생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슬람 사원 인근에 교회를 너무 많이 짓는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 등장할 민주 정부에 기독교 인사들이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슬람교계의 인식도 일부 작용하고 있다. 두 교파 간의 오랜 반목은 드디어 9월9일 일요일, 현실로 나타났다. 그날 일단의 기독교도들은 교회 방화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카이로 중심부에 있는 교회로 가고 있었다. 이 단계까지는 평화적 행진에 불과했다. 무슬림들이 이들을 공격했다. 자연히 두 교파 사이에 폭력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보안군 장갑차들이 나타났다.

군인들은 무작정 여섯 명의 시위자들을 장갑차로 압살했다. 이어 다수의 군중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다. 군부는 혁명 이후  독재에서 이집트를 구출한 ‘구세주’ 또는 ‘민주화의 보루’로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왔다. 시민들은 이날 군인들이 시위대를 악랄하게 진압하는 광경을 보면서 경악했다. 군인들의 야만적 살육 행위에 격분하기는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두 종교 집단은 순식간에 하나로 뭉쳐 보안군과 대결했다. 밀고 밀리는 충돌은  4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24명이 죽고 3백여 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24명 중 20명이 기독교도들이었다. 이집트 혁명이 암울한 전환점을 맞는 순간이었다.

이날 밤 군인들의 행동은 거의 광적이었고, 그래서 그 의도를 둘러싸고 추측이 무성하다. 무바라크 정권은 소수 기독교도들을 잘 보호해주었다. 그 덕분에 무바라크 30년 집권 중에는 두 교파 간 충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월 혁명 이후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군부가 기독교도들을 보호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 틈을 타 무슬림들은 심심하면 교회를 공격하고 방화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기도 했다. 군부는 이런 사태를 방관하거나 묵인했다. 일요일의 유혈 사태를 목격한 종교계가 뒤늦게 어떤 음모를 감지했다. 바로 군부의 장기 집권 욕망이었다. 현재 이집트 군부에는 무바라크 시절의 실세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 정부가 들어설 경우 숙청되거나 감옥에 갈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들이 두 종파 간 갈등을 구실로 군부 통치를 연장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군부의 집권 음모에 무바라크의 추종 세력이 끼어 있다는 설도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에 대한 이집트 국민의 신뢰는 깡그리 사라졌다. 이집트 혁명은 8개월 만에 원점으로 되돌아간 형국이다. 일부 시민들은 지금의 군부 독재가 무바라크 시대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하다고 규탄한다. 심지어 3천명의 시위대를 학살한 시리아 군대보다 더 야만적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집트의 미래는 순식간에 암흑 속에 던져졌다. 반(反) 군부 시위를 주도하는 한 지도자는 이제 와서 이집트 국민들이 군부를 상대로 봉기한다면 어떤 사태가 올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고 한탄했다. 2월 혁명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타흐히르 광장은 절망과 좌절의 장소로 변했다.

▲ 한 이집트 시민이 군부를 비난하는 포스터를 만들고 있다. ⓒEP연합A

이집트의 임시 정부를 지배하고 있는 군부는 조속한 민정 이양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권력 이양 약속은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다. 당초 9월로 예정되었던 국회의원 선거는 두 달이 늦어진 다음 달 실시될 예정이나 의원 선거 후에도 대통령 선거 일정이 내년 말로 잡혀 있어 실질적인 민정 이양은 2년 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이 일정이 제대로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인들의 총탄에 가족을 잃은 한 시민은 이집트 혁명이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라고 개탄했다. 일요일 밤의 유혈 진압을 계기로 “카이로가 시리아로 변했다”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지금까지 군부와 국민들 간에는 신뢰가 존재했으나 더 이상 군부를 믿는 국민은 없어 보인다. 한 시민은 군부와 시민을 연결하는 가교는 유혈뿐이라고 비꼬았다. 

기독교 병원의 의사들은 피살된 17구의 시체들을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시체들은 장갑차에 깔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군부는 왜 그토록 잔혹한 진압을 자행했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불행한 사태’가 발생해 진상을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군부와 국민을 이간시키려는 어떤 음모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도 민간 내각도 종교적 배경을 이유로 국민을 차별하는 일체의 행위를 엄단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신뢰가 실종된 상태에서 정부의 다짐은 공허하게 들렸다.

민정 이양 약속 지킬지가 관건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이슬람 지도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황급히 만나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조속히 제정할 것을 임시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배후에서 종교 갈등을 부추기는 군부가 이 요청에 응할 전망은 없어 보인다. 이집트 사태의 파장은 즉각 유럽과 미국에까지 도달했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이집트의 모든 당사자가 자제력을 발휘해 강력하고 단결된 이집트 재건에 나설 때이다”라고 강조했다. 유럽연합(EU) 대변인은 민주적인 이집트를 건설할 군부의 능력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군의 이성 회복을 촉구했다. 이집트 사태가 중동 전체의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집트의 분열과 혼란은 특단의 반전이 없는 한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혼미한 사태가 계속되자 이민을 생각하는 기도교인들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특히 11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슬람 후보들이 의석을 석권할 경우 기독교인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이집트의 운명은 어차피 군부의 손에 달렸다. 이들이 민정 이양 약속을 무효화하고 군사 정권 수립을 강행한다면 사태는 예측할 수 없다. 서방 전문가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배제하고 있으나 군부의 욕망과 시민의 저항이 장기화할 경우 이집트 혁명의 전도는 예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 많은 이집트 시민은 ‘이럴 바에는 왜 혁명을 했는가?’ 하고 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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