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이라 쓰고 ‘후원금’이라 읽는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1.12.1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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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출판기념회 실태 추적 / 전수 조사 결과 9월부터 재적 의원의 3분의 1이 행사 치러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의 복도 벽면을 가득 채운 여야 의원들의 출판기념회 포스터. ⓒ 시사저널 유장훈

정치권이 여당 해체설과 야권 통합 진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회에는 화환이 넘쳐난다. 바야흐로 ‘출판기념회 시즌’인 탓이다. 국회 내 건물 곳곳과 국회 밖에는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포스터와 현수막들이 즐비하다. 주요 행사장은 출판기념회를 찾은 인파들로 연신 북적인다. 같은 행사장에서 하루 내 두 건의 출판기념회가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각종 대형 이슈가 돌출하며 정국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의원들의 출판기념회는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지난 11월22일 오후 한나라당이 한·미 FTA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 할 때도 상당수 야당 의원들이 동료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상태였다는 것이 알려져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렇다면 18대 국회 들어 얼마나 많은 수의 의원들이 출판기념회를 가졌을까. <시사저널>이 현 재적 의원 2백95명의 출판기념회 실태를 추적해본 결과, 12월8일 현재까지 출판기념회를 1회 이상 가진 의원은 총 1백45명이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의원들이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진 셈이다. 특히 올 하반기 들어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18대 국회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의원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을 이루는 것이다.

평소 의원들의 출판기념회는 한 달에 두세 건을 넘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많아야 대여섯 건 수준이다. 그런데 지난 6월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기록하더니, 하반기인 9월 이후부터는 그 수가 폭증하고 있다. 급기야 지난 11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44명의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26쪽 그래프 참조). 이런 추세는 12월에도 계속되고 있다. 12월8일 현재까지 18명의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결국 지난 9월1일 이후 현재까지 약 100일 동안에만 출판기념회를 가진 의원의 수가 무려 92명에 달한다. 전체 재적 의원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총선 90일을 앞둔 내년 1월11일부터 출판기념회가 금지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원들의 출판기념회 ‘러시’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적합한 장소와 유력 정치인 섭외 경쟁 치열

이는 비단 국회 내에서만 빚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국회 밖에서도 내년 총선 출마를 노리는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 터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합한 출판기념회 장소를 물색하기 위한 경쟁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등 유력 정치인들을 참석시키기 위한 섭외 경쟁이 치열하다. 박근혜 전 대표측 관계자는 “출판기념회에 와 달라는 초대장이 정말 많이 도착한다. 직접 연락을 취해 참석을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요청에 일일이 응하기는 어려워 (박 전 대표가) 참석한 적은 많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흥행’을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가 동원되기도 한다. 주요 인사들의 축사로 일관되었던 과거의 출판기념회와는 달리, 사회 각계의 명사들을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하는 방식이 각광받고 있다. ‘청춘 콘서트’의 영향이다. 문화 공연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재미있는 출판기념회’를 표방하는 것도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유명 연예인이나 예술인을 무대에 초대해 볼거리를 제공하는 식이다. ‘소통 중시’ ‘대중 친화적’ 등의 이미지를 만드는 효과를 노린 출판기념회로 풀이된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이렇게까지 봇물을 이루는 것은 역시 ‘돈’ 때문이다. 보통 현역 의원이 여는 출판기념회에는 최소 5백명, 많게는 1천명 이상이 참석한다. 해당 의원이 소속된 상임위와 관련되는 정부 부처 인사 및 이익 단체·기업 관계자, 동료 정치인 등이 대다수이다. 관례적으로 10만원가량을 내고 책을 사는 것이 보통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금액을 지출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누가 얼마의 액수를 냈는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책값은 정치 후원금으로 분류되지 않아 공개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판기념회 초청장을 받은 정부 부처와 이익 단체 및 기업측에서는 고민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의원실의 비서관은 “금액은 다 다르지만, 재벌 기업의 경우 보통 봉투에 100만원 정도 넣기도 한다. 어디만 가고 어디는 안 가고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비용도 상당할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10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의 간부는 “초청장이 오면 가급적 다 참석하고자 한다. 금액은 남들 하는 만큼 한다”라며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굳이 부인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출판기념회를 여는 데에는 만만찮은 비용이 든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책 출간 비용이다. 각 의원들이 찍어내는 책의 수는 3천권부터 5천권 이상까지 다양한데, 대략 2천만원에서 5천만원 상당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출판기념회 당일 행사 진행을 위한 비용이 추가된다. 포스터 및 현수막 제작, 대형 걸개사진 준비, 동영상 촬영 등에 최소 2백만원에서 7백만원 사이의 돈이 들어간다. 국회를 벗어나게 되면 장소 대관료까지 더해진다.

초선급 1억원, 중진급 2억~3억원 벌어

이렇듯 상당한 비용 지출을 감수하고 출판기념회를 여는 이유는 책 판매를 통해 큰 수익을 기대하는 까닭이다. 초선급은 1억원, 재선 이상 중진급은 2억~3억원가량을 ‘책값’ 명목으로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상 1년 동안 모금 가능한 후원액이 최대 1억5천만원(선거가 있는 해는 3억원)인 데다가, 일부 유력 정치인들을 제외하고는 실제 모금 액수가 그에 많이 못 미치는 점을 고려하면 출판기념회를 통한 수익은 상당한 액수이다.

특히 국회 내 행사장은 주요 인사들이 방문하기가 수월해 책을 많이 판매할 수 있는 장소로 손꼽힌다. 최근 출판기념회를 진행했던 의원실측의 한 관계자는 “책 출간 및 출판기념회 계획 자체가 국회 내 행사장을 언제 사용할 것인지 결정한 후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원하는 날짜에 이들 행사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는 후문이다. 행사장 예약은 행사일 두 달 전 오전 9시에 자체 예약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12월1일에 출판기념회를 갖고 싶다면 10월1일 9시에 시스템에 접속해 예약을 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올 하반기 들어 한동안 일부 의원실의 일과는 국회 내 행사장을 확보하기 위한 ‘클릭 경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출판기념회가 편법적인 정치 후원금 모금의 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대해 볼멘소리가 나온다. 지난 2004년 각종 정치 자금 비리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업고 강도 높은 정치자금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일명 ‘오세훈법’이 그것이다. 이른바 ‘후원의 밤’ 행사를 열어 정치 자금을 모았던 관행을 전면 금지시킨 것이다. 정치인들은 출판기념회를 통해 얻은 수입과 지출에 대해 공개할 의무가 없다. 깨끗한 정치를 위해 후원 행사를 금지한 것이 도리어 ‘검은돈’을 양산하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정치자금법의 관련 규정을 현실에 맞게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민전 경희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후원 행사를 허용하되 미국처럼 그 사용에 대해 엄격히 규제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총선을 염두에 두고 급하게 책을 내다 보니 그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출판기념회를 열 계획이 없다고 밝힌 한 의원측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좋은 책을 쓰는 의원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많은 책이 쏟아지다 보니, 정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분위기에 덩달아 휩쓸리고 싶지 않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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