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말하라”…오늘도 간절한 ‘소녀의 기도’
  • 김세희 기자 ()
  • 승인 2011.12.2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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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평화비 ‘순희’

한낮 기온이 영하 10℃ 아래로 내려간 지난 12월23일 낮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1천회 집회 기념 소녀상에 이름 모를 행인들이 놓고 간 월동 용품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유장훈

위안부 가운데 한 명인 황금자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남은 돈 3천만원을 서울 강서구에 내놓겠다며 유언서를 작성했다. 황금자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갈 당시의 나이는 열세 살. 지금의 나이로 보면 초등학교 6학년생의 나이이다. 그런 소녀가 하루에 적게는 다섯 명에서 많게는 열다섯 명의 군인을 상대로 몸을 내주어야 했다. 또 다른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천황 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했어요. 하룻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고, 임신을 했는데 치료를 해준다더니 ‘아직 쓸 만한데’ 하는 생각으로 자궁 채로 태아를 들어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 집회가 1천회를 맞은 지난 12월1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길, 단발머리를 곱게 빗은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았다. 추운 겨울, 무명 저고리에 동강 치마를 입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소녀는 맞은편 일본 대사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불끈 쥔 두 주먹과 굳게 다문 입술은 살을 에는 바람에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 소녀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운성씨는 한 인터뷰에서 “제작을 하면서 할머님들을 생각하고 일본을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점점 손이 주먹을 쥐게 되더라, 어쩔 수 없이. 그래서 주먹을 쥐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험했던 그 시절의 꽃다운 소녀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누군가 이 청동 소녀상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름은 ‘순희’. 순희는 이제 춥지 않다. 홀로 앉아 추위에 떨 순희를 위해 시민들은 털모자를 씌워주고 무릎 담요를 덮어주고 신발 대신 목도리를 따뜻하게 둘러주었다. 순희 옆 작은 의자에는 꽃다발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순희들에게 아직 일본 정부의 태도는 차갑기만 하다. 그래서 이 땅의 순희들은 오늘도 외친다.

“우리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죽기 전에 말하라, 일본 정부여! 위안부 여성들에게 미안하다고 나에게 말하라. 나에게, 나에게, 나에게! 말하라. 미안하다고 말하라.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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