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보다 잔혹했던 ‘닮은꼴 최후’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1.12.2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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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독재자들 대부분 비극적 파멸 맞아…성난 민중에게 맞아 죽거나 거세형 당하기도

(왼쪽부터)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맨 대통령, 로랑 그바그보 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 EPA·AP연합

인간이 죽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러나 독재자의 삶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대부분 비극적 파멸로 마감된다. 영국 정치가 이노크 파월은 독재자들의 최후가 잔혹한 것은 정치와 인간사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의 논평은 많은 독재자로부터 비난을 샀으나 정곡을 찌른 면이 있다. 민주 국가의 지도자가 은퇴 후에 죽으면 그의 죽음은 개인사가 되지만 독재자의 죽음은 죽음조차 정치 행위로 치부된다. 그 죽음이 독재의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권력의 정점에서 자신의 침실에서 죽으면 그의 장례는 휘황찬란한 권력의 드라마로 미화된다. 하지만 독재자가 민중에 의해 처형될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사가 펼쳐진다. 이는 붕괴한 권력의 특질과 분노한 군중의 복수 때문이다. 

독재자의 최후를 극명하게 보여준 가장 최근의 주인공은 지난 10월 하수구에서 끌려나와 반군에 의해 즉결 처분된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이다. 그의 최후와 다른 수많은 독재자의 최후를 비교할 때 유일한 차이점은 처형 장면이 휴대전화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이 영상은 온 세상에 공개되었다. 로마의 폭군 칼리굴라도 카다피보다 더 잔혹하게 처형되었지만 당시에는 휴대전화 같은 첨단 장비가 없어 그 모습은 조용히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루마니아의 공산당 서기 겸 국가 수반이었던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는 1989년 헬리콥터로 도주하다가 군중에게 붙잡혀 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는 성난 군중들이 단 2시간 만에 구성한 인민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 자리에서 처형됨으로써 정치적 조롱까지 받았다. 이에 비하면 토끼굴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정식 재판을 받고 처형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독재자치고는 제법 ‘대우’를 받은 편이다.

일부는 죽은 뒤 봉변 면하려 후계자 양성

독재자들을 처형할 때는 성서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요소도 등장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아하브 왕이 처형되면서 흘린 피는 개가 핥아먹었다. 그의 아내 제제벨은 발코니에서 창밖으로 던져져 죽었다. 독재자들의 처형은 방식이 변했을 뿐 고대나 근세나 그 광기와 독기는 비슷하다. 비잔티움 왕국의 안드로니쿠스 1세는 폭도들에 구타당해 절명한 후 사지는 찢어지고 머리칼과 치아는 뽑혔다. 미남인 그의 얼굴은 펄펄 끓는 물을 덮어쓰고 일그러졌다. 근세의 끔직한 처형 사례로 차우세스쿠의 경우를 자주 인용하지만 1958년 이라크 왕 파이잘 2세와 그의 삼촌의 최후는 더 처참하다. 겨우 23세의 파이잘 왕은 사실 잘못이 없었으나 삼촌의 폭정에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두 사람은 뾰족한 창에 찔려 죽었다. 시신은 분해되고 머리는 축구공으로 사용되었다. 1996년 친(親)소련 정책을 폈던 아프가니스탄의 나지불라 대통령은 거세형을 당한 뒤 거리에서 끌려다니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부 서방 지도자들은 독재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행위가 반독재 민중 봉기의 도덕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카다피의 처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사형(私刑)이 그의 폭정에 비하면 오히려 관대하다고 반박한다. 처칠은 독재자들의 운명을 호랑이 등에 올라탄 모습에 비유했다.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리고 싶어도 뛰어내리지 못하는 것이 독재자들의 숙명이다. 독재자들의 종말은 죽어야 온다. 더러는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심판받는 경우도 있다. 폭정의 공포에 진절머리가 난 로마인들은 왕을 암살하는 데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왕이 죽었다고 해도 속임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왕의 시신을 직접 보고 온갖 방법으로 훼손했다. 정육점 냉장고에 버려진 카다피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긴 줄을 섰던 리비아인들의 심정이 이를 증명한다.  

스탈린은 1953년 뇌출혈이 오자 전속 의사 12명을 반역죄로 체포했다. 스탈린은 충복들이 의사를 부를 때까지 12시간 이상 오줌을 싼 채로 누워 있어야 했다. 뉴욕타임스는 카다피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을 ‘자기 파괴자(author of own destruction)’로 정의했다.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침대에서 죽는 것 이상의 영광은 없다. 병이 들어 서서히 죽어갈 때는 이것이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브레즈네프, 티토, 프랑코, 마오쩌뚱의 주치의들은 독재자를 살리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을 ‘영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후계자를 양성해 자신의 죽음에 따른 봉변과 조롱을 해소한다. 북한의 김씨 일가도 그 범주에 속한다.

“살려둔 채로 응징해야 독재 막을 수 있어”

모든 독재자는 교활한 수법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공포, 환영(幻影), 자기 도취, 쇼맨십, 매력 같은 수법을 동원한다. 그 점에서 독재자들은 최고의 자기 연출자이다. 애첩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한 히틀러는 자신의 최후를 스스로 연출한 점에서 거의 천재적이다. 독재자들은 민중의 생명은 하찮게 여기면서 자신의 생명과 안위에 대해서는 거의 편집광적인 욕망을 보인다. 튀니지의 벤 알리는 ‘아랍의 봄’으로 정권이 무너지자 국외로 도주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붉은 휘장을 두른 채 가만히 앉아서 최후를 맞는 독재자는 없다. 독재자들은 대부분 비밀 도주로를 만든다. 위험이 감지되면 즉시 도망가기 위해서다. 또한 수십 년에 걸쳐 지하 벙커를 구축한다. 이라크 전쟁 초기 김정일이 지하 벙커에 들어가 근 50일 동안 외부로 나오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독재자들은 평소에 자신에게 순종하는 군중들이 권력이 무너지면 폭도로 변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언제나 권력의 종말이 가져오는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역사가들은 종종 독재자들을 너무 잔인하게 처형함으로써 그들을 ‘순교자’로 만드는 아이러니도 연출된다고 지적한다.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보너스를 받는 셈이다. 가능하면 독재자들을 오래오래 살려두고 민중의 분노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독재자가 만든 허구의 역사를 다시 쓰는 광경을 목격하도록 함으로써 미래의 독재를 예방하려는 방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대를 이어가면서 민중의 함성과 비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다피에 대한 린치를 목격한 리비아의 한 역사가는 독재자를 야만적으로 처형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독재자가 민중을 죽였으니 민중도 독재자를 죽이고, 독재자가 민중을 공격했으니 민중도 독재자를 공격하는 방식은 폭력을 되풀이하는 것이고 종국에는 민중도 독재자를 닮아간다는 논리이다.

독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폭정을 정당화하는 데 신을 동원한다. 자신의 모든 행위는 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처음부터 면책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1953년 혁명에 성공한 후 한 말은 유명하다. “나를 비난하라.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역사가 나를 용서하니까.”

긴 역사에서 본다면 독재자들에게 지하 벙커나 비밀 통로보다 더 좋은 도피로는 죽음이다. 따라서 그들을 살려두면서 역사와 민중이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독재자를 응징하고 또한 독재를 예방하는 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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