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개인’들이 깨운 대학의 분노
  • 이규대 기자 · 강청완 인턴기자 ()
  • 승인 2012.01.1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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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스 사태’ 시국 선언으로 새로운 사회 참여 물꼬 터…일반 학생이 주도하고 총학생회가 힘 보태

지난 1월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학생들이 ‘디도스 사태’와 관련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그래도 이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평소 정권에 그다지 비판적이지도 않았고, 시위나 집회에도 나가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에서마저 이런 부정이 나오는 것은 정말 아니다.”

서울대 사회학과(3학년)에 다니는 원종진씨(22)는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태’(디도스 사태)를 접하고 분노했다. 철저한 수사를 바탕으로 근본부터 파헤쳐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은 “윗선 개입은 없다”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로서는 경찰의 발표가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러던 차에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게시물을 보았다. ‘시국 선언’을 통해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자는 제안이었다. 그 글을 보자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시국 선언문까지 썼다. 원씨에게는 이번 디도스 사태가 사회를 향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요즘 대학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겨울 방학임에도 디도스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외침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시국 선언’이 있다. 지난해 12월 초 한 서울대 학생이 처음 제안한 시국 선언에는 1월15일 현재 15개 대학이 참여했다. 디도스 사태를 두고 대학가에 일던 분노가 ‘시국 선언’이라는 불씨를 만나 본격적으로 점화된 모양새이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표출된 여론을 바탕으로 학생 개개인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는 점이 주목된다.

경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 지난해 12월 초 서울대생 이하결씨는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 ‘시국 선언’을 제안했다(40쪽 인터뷰 기사 참조). 이씨의 제안은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이씨의 뜻에 동참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논의를 주도해나갔고, 이후 서울대 총학생회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측이 힘을 보태며 일이 구체화되었다.

온라인 커뮤니티·SNS 활용 돋보여

지난 1월12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대학생들이 ‘디도스 사태’와 관련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김미류
활동은 두 가지 방향에서 펼쳐졌다. 하나는 시국 선언문을 쓰고 여기에 동의하는 학생들로부터 서명을 받는 것이었다. 문제는 서명운동을 진행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전자 서명’ 방식이었다. 학내 웹개발 동아리에 맡겨 학교 계정 인증을 통해 온라인으로 손쉽게 서명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지난해 12월26일 인터넷 웹페이지를 열어 시국 선언문을 알리며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3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모금 활동을 해 신문에 광고를 싣는 것이었다. 기성세대에게는 여전히 신문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 시국 선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십시일반 모은 2천1백40만원으로 1월9일자 한겨레에 광고를 냈다.

서울대에서 진행된 시국 선언은 다른 대학들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지난 1월3일, 카이스트에는 서울대와 비슷하게 시국 선언을 위한 전자 서명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국 선언을 준비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학생회 주도가 아닌,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 카이스트 총학생회의 한 관계자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해나갔으며, 총학생회는 이를 도와주는 정도였다. 앞으로 총학생회가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논의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일부 대학의 총학생회가 의욕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바람’으로 번져갔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고려대 총학생회였다. 지난해 12월28일 ‘민족고대 총학생회 시국 선언 서명 페이지’를 열고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겨울 방학 중이라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온라인을 통한 서명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스마트폰 모바일 서명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여는 등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활발하게 홍보를 했다.

한편 고려대 총학생회는 ‘비운동권’ 성향인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 모임(이하 전대총)에 공동으로 시국 선언을 하자고 제안했다. 전대총 소속 12개 대학 총학생회는 이에 동의했다. 흐름은 연세대 총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지난 1월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1월9일 독자적인 시국 선언을 재차 발표하며 디도스 사태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라고 강하게 촉구하기도 했다. 이어 12일에는 이화여대 총학생회, 건국대 일부 단과대 학생회 및 학생 단체가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이렇듯 시국 선언 바람은 더욱 번질 조짐이다.

이처럼 대학생들의 시국 선언이 잇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에게 디도스 사태는 상식과 원칙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린, ‘민주주의의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박종찬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의도적으로 선거를 방해한 공작이라는 점에서 부정 선거로까지 볼 수 있는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지봉민 중앙대 총학생회장은 “특히 올해는 총선 및 대선이 있는 중요한 해인 만큼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국 선언에 함께했다”라고 말했다.

1980~90년대 대학가 시위 문화와 판이해

이번 시국 선언을 계기로 나타난 대학생들의 새로운 사회 참여 방식은 옛날과는 완전히 다르다. 기존에는 운동권 성향의 각 대학 총학생회나 학생 단체가 깃발을 들고, 여기에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라인 공간에서 만들어진 여론이 학생 개개인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지고, 이를 총학생회 등의 조직이 옆에서 돕는 형태였다. ‘전자 서명’처럼 새롭게 나온 수단 또한 인상적이다. 대학 시위는 운동권의 몫이라는 등식도 허물어졌다. 이번 시국 선언을 주도한 측은 비운동권 학생들과 단체들이었다.

그렇다면 기존 운동권 계열 총학생회측에서는 이런 흐름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은 지난 1월12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디도스 사태를 빨리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와 관련해 이전까지 한대련은 성명서만 발표했을 뿐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가에서 디도스 문제가 중심적인 이슈로 떠오르자, 기자회견을 통해 힘을 더하는 모양새이다. 반면 최근의 시국 선언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갈 길’을 가겠다는 입장도 있다. 전국학생행진에서 활동하고 있는 허현재씨(21)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사건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反)신자유주의 운동, 쌍용차 해고 노동자 문제 같은 일에 집중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번 디도스 사태가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 분위기를  높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시국 선언에 참여했던 이들이 그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은 눈길을 끈다.

<시사저널>이 만난 학생들은 모두 시국 선언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도록 행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향후 특검 활동 및 조사 결과에 따라 기자회견·집회 등 후속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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