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삼성가 ‘3세’패션업계 양분할까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02.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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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올해 프리미엄 아웃렛 개점 / 국내외 고급 브랜드 추가 인수해 1위 제일모직 압박 전망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1972년 출생 1991년 경복고등학교 졸업 1997년 연세대 사회학과 3년 1999년 하버드 대학 스페셜스튜던트 과정 이수 2001년 현대백화점 기획실장(이사) 2002년 현대백화점 기획관리담당 부사장 2003년 현대백화점그룹 총괄부회장 2007년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 시사저널 김미류(왼쪽), ⓒ 뉴스뱅크이미지(오른쪽)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올해 프리미엄 아웃렛을 개점한다. 현대백화점의 프리미엄 아웃렛 출점은 2010년부터 추진되었지만, 그 시기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회장은 최근 국내 최고의 여성복 전문 업체를 인수하면서 패션 사업을 그룹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의류의 특성상 경기 악화로 재고가 남으면 처분하기가 만만치 않다. 정회장은 이를 해결할 프리미엄 아웃렛이 필요했다. 부지는 경기 파주나 이천 등이 유력해 보인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프리미엄 아웃렛 출점이 올해 업무보고서에 담겨 있다. 이미 윗선에서는 정했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40~50km 떨어진 곳을 대상으로 물색 중인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정회장이 프리미엄 아웃렛을 개점하는 배경에는 패션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고 정주영 회장의 손자인 정회장은 2010년 ‘비전 2020’을 발표하면서 그룹 성장 동력은 유망 사업의 M&A(인수·합병)를 통해 발굴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현대백화점, 한섬 인수하면서 추격 고삐

그 첫 실현 사업으로 패션 사업을 택했고, 지난 1월에 국내 1위 여성복업체인 한섬을 인수했다. 패션업계에서 1위를 달리는 제일모직 이서현 부사장에게 도전장을 낸 것이다.

해외 명품 브랜드를 들여올 수도 있었지만 정회장은 국내 브랜드를 인수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패션업계 트렌드를 읽은 것이다. 과거에는 생산은 중소기업이, 판매는 백화점이 담당했지만 최근에는 백화점이 제조에까지 관여하는 추세이다. 신세계와 롯데가 지난해 각각 국내 생산 기반을 갖춘 톰보이와 나이스크랍을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대는 1990년대 초반에 시기를 놓쳐 할인점 시장 진출에 실패했다. 이런 트라우마를 가진 정회장으로서는 패션 사업을 성장 동력으로 정한 이상 다른 기업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섬 인수는 절박했다. 

1987년 설립한 한섬은 타임·마인·시스템·SJSJ 등 국내 고급 브랜드를 차례로 성공시킨 국내 여성복 1위 기업이다. 또 해외 명품인 발렌시아가·끌로에·랑방·지방시 등의 국내 영업권과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지난해 매출 5천억원, 영업이익 1천억원을 기록한 데다 부채 비율은 13%밖에 되지 않는 알짜배기 회사이다. 이 회사의 정재봉 사장(72)은 고령인 데다 그의 자식들이 패션 사업에 관심이 없어 지배 구조에 위험 부담이 생기자 결국 M&A를 결정했다.

한섬이 M&A 시장에 나오자 거의 모든 패션업체가 눈독을 들였다. 마지노선은 4천억원이었다. 이 정도의 금액을 제시할 기업은 몇 개로 좁혀졌는데, 특히 삼성의 제일모직이 유리해 보였다. 패션업계 1위인 데다 자금 동원력도 있고, 무엇보다 약한 여성복 부문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정재봉 한섬 사장을 만나 인수 문제를 논의한다는 정보까지 새어나올 정도였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한섬은 여성복 부문에서 뛰어난 업체이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을 들일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라며 한섬 인수를 포기한 배경을 설명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정회장은 한섬을 4천2백억원에 인수했다. 최대 주주 지분 34.65%를 확보하는 데 자기 자본 8천억원의 절반을 쏟아부은 것이다. 또 한섬 직원의 고용을 보장하고 정재봉 사장의 경영권도 인정하는 등 한섬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제일모직은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캐주얼, 잡화 등을 아우르는 종합 패션 기업이지만 상대적으로 여성복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회장은 이 점을 노렸다. 그는 직접 한섬의 정재봉 사장을 만나 인수를 마무리했다.

한섬은 신세계인터내셔널(SI), 형지, 신원, SK네트웍스 등과 함께 패션업계 중위권을 형성하고 있는 업체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정회장은 이 업체를 인수하면 제일모직, LG패션, 코오롱 등이 포진하고 있는 패션업계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백화점과 홈쇼핑 등 든든한 유통망을 가지고 있어서 고가의 명품 브랜드를 띄울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정지선 회장이 ‘패션 산업을 하려면 한섬 같은 회사를 손에 넣어야 한다’며 올해 초 정재봉 한섬 사장을 만나 결정한 것으로 안다. 한섬의 기획·제조 능력과 현대의 유통망이 결합하면 더 큰 힘이 나올 것이다. 앞으로 한섬을 통해 현대홈쇼핑에 맞는 독자적인 상품도 개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은 국내외 고급 브랜드를 추가로 인수할 계획이다. 이 청사진대로라면 현대백화점그룹은 신세계, 롯데 등 다른 백화점의 패션 사업 규모를 뛰어넘어 삼성의 제일모직을 압박할 것이라는 관측이 가능하다. 박종렬 HMC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LG패션, 신세계인터내셔널 등은 패션업계 상위권이지만 자체 상표보다 외국 브랜드를 판매하는 유통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패션업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현대백화점그룹은 한섬을 인수하면서 자체 제품을 확보한 셈이다. 앞으로 정회장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따라 삼성의 제일모직을 압박할 힘을 낼 수도 있다”라고 전망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제일모직 관계자는 “한섬은 여성복 시장의 지배적인 브랜드를 보유한 회사이고 현대백화점그룹에서 판로를 확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패션 경험이 부족하므로 상품적인 측면에서는 역으로 약화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제일모직, 거침없는 성장세 돋보여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1973년 출생 1992년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1997년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 졸업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 2004년 제일모직 패션 부문 기획팀 부장 2005년 제일모직 패션 부문 기획담당 상무 2009년 제일모직 패션 부문 기획 담당 전무 2010년 제일기획 기획 담당 전무 2010년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 ⓒ 연합뉴스
제일모직의 이서현 부사장과 현대백화점그룹의 정지선 회장은 마흔 초반의 재벌 3세 경영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패션 사업에 대한 경험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고 이병철 회장의 손녀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제일모직에서 패션 실무를 쌓았다. 반면, 정회장은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고, 패션 사업에 경험도 없다. 현대백화점에서 실무를 쌓을 때도 기획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등 경영 수업만 받았다. 이런 차이로 제일모직은 쉽게 공략당할 기업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게다가 제일모직에서 전자 재료와 화학 부문은 박종우 사장이 담당하므로 이부사장은 패션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2009년 부사장 취임 후 그는 토리버치·발렉스트라·릭오웬스 등 고급 브랜드를 차례로 품에 안았다. 지난해에는 악어 가죽 핸드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인 콜롬보를 인수했다. 올해에는 2030세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캐주얼 브랜드를 선보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남성복은 상품 기획력과 유통 경쟁력을 강화하며, 여성복은 수익성 개선 및 신규 사업의 강화로 경쟁력을 확보할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제일모직은 보유한 브랜드만 빈폴·갤럭시·구호 등 30개에 이르고, 의류부터 잡화까지 종합 패션 기업의 면모를 탄탄히 갖췄다. 유통망도 약하지 않다. 백화점과 독립 점포 등 모두 1천3백53개 매장에 브랜드를 입점시켰다. 특히 서울 청담동 등지에 매장을 둔 만큼 현대백화점그룹과의 경쟁이 불가피해 보인다.

최근 판세를 살펴보면, 제일모직의 이부사장은 해외 시장 진출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빈폴을 뉴욕에 입점했고, 갤럭시와 라피도를 중국에 진출시켰다. 한편, 현대백화점그룹 정회장은 당분간 내실 다지기에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한섬의 브랜드를 강조하면서, 프리미엄 아웃렛 등으로 판매망도 확대할 계획이다.

2011년 말 현재 제일모직의 패션 부문 매출은 1조5천억원대로 현대백화점그룹 패션 부문(한섬 포함)의 두세 배가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출발하는 정회장이 제일모직의 이부사장을 따라잡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는 M&A와 프리미엄 아웃렛 외에 혁신적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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