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새는 줄 모르고 예술에 취했을까
  • 조재길│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
  • 승인 2012.02.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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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출당한 저축은행들에서 고가 미술품 등 은닉 자산 드러나…예금보험공사, 경매 통해 매각 추진

"지난해 부산저축은행의 출납 장부를 면밀하게 살펴보던 예금보험공사 직원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미 영업정지된 저축은행의 자산 중에 많이 들어본 미술품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예보는 퇴출당한 저축은행이나 저축은행의 대주주들이 과거와 달리 고급 미술품 등을 취득하는 사례가 잇따르자 지난해 8월 특수자산부를 신설했다.

검찰과의 공조도 강화하고 있다. 검찰이 범죄자들의 은닉 재산을 적발하면 예보는 이를 바탕으로 일괄 계좌 조회 권한 등을 이용해 추가 은닉 재산을 찾아 나선다. 예보가 미술품과 같은 특수 자산을 매각한 돈은 영업정지된 저축은행에 5천만원 이상 예금한 사람이나 후순위채 투자자 등에게 나누어준다.

예보는 부산저축은행 계열사(부산 부산2·중앙 부산·대전·전주 저축은행) 및 삼화·도민 저축은행에서 압류한 미술품을 서울옥션을 통해 매각하기로 했다. 서울옥션이 국내뿐만 아니라 홍콩 등 해외에서도 다양한 물품을 경매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압류품은 모두 퇴출당한 저축은행 경영진이 부실 대출의 담보로 확보했거나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것들이다. 앞으로 서울옥션을 통해 경매로 나올 예보 소장품은 총 91점이다. 중국의 유명 화가 작품만도 15점에 달한다. 예보와 같은 공공 기관이 예술품을 이처럼 대거 경매에 내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보 관계자는 “가급적이면 높은 가격을 받고 팔아야 저축은행 고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돈을 돌려줄 수 있다. 장기간 소장하면 더 높은 가격을 받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처분하는 것이 전체 고객에게는 더 이익이다”라고 설명했다.

부산저축은행이 불법 대출 과정에서 취득한 중국 화가 장샤오강의 작품과 보물 문화재 .

박수근 그림 ‘햇빛’…보물 18점 등 문화재도

특히 부산저축은행의 불법 대출 과정에서 담보로 제공된 서울 논현동 워터게이트갤러리 소장품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갤러리는 구속된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대표의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중국 아방가르드 대표 화가인 장샤오강의 ‘혈연-대가족’ 시리즈와 ‘블러드라인’ 시리즈, ‘빅패밀리’ 등이 대표적이다. 경매 시장에서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천리엔칭의 <잠긴 도시> <전쟁을 피한 날> <분노의 청년> <여행의 끝> <선로의 여행길> 등 다수 작품이 있다. 천리엔칭은 주로 건축물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판즈의 ‘스카이’ ‘트라우마’ 시리즈도 유명한 작품이다. 정치색이 짙은 그의 그림은 네 점이 포함되었다. 청판즈는 홍콩 경매 시장에서 최고 99억원의 기록을 세웠던 화가이다. 인자오양의 ‘천안문’ 시리즈와 <블루포이트리>는 최근 해외 경매 시장을 달군 미술품이다. 이 밖에 펑쩡지에와 양사오빈 등 중국 현대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포함되었다.

미국 신표현주의 화가인 줄리안 슈나벨의 작품도 다섯 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마더>가 있다. 국민 화가 박수근의 <줄넘기하는 아이들>도 오랜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1960년대에 그려진 이 작품은 시가 12억원 상당으로 알려졌다. 재미 원로 작가인 임충섭의 <풍경>, 김점선의 <말 판화>, 박성태의 <인체 철망> 등도 경매로 나온다. 박성태씨는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리스와 같은 금속성 망을 주 재료로 사용하며, 말이나 인체 형상을 떠내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인기 화가인 오치균의 <서울 풍경>도 있다. 이들 작품의 장부 가액은 총 100억원가량이다. 예보는 경매를 통해 최대 2천억원 정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고급 차와 3백억원짜리 벌크선도 압류

김민영 전 부산저축은행 대표는 <월인석보(月印釋譜)>를 비롯해 보물 문화재 1천여 점을 갖고 있었다. 김씨는 검찰 조사가 시작되자 이들 문화재를 서둘러 매각하려다 들통 나기도 했다. 검찰이 당시 확보했던 문화재는 <월인석보> 등 보물 18점, 고서화 9백50여 점 등이다. 트럭에 넣으면 3?4대 분량에 이른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월인석보 권 9·10>을 비롯해 <경국대전 권 3> ‘정약용 필적 하피첩’, 다수의 불교 관련 서적 등이 포함되었다.

김 전 대표는 보물 18점을 한 사업가에게 10억원이라는 헐값에 넘기려고 시도했고, 고서화의 경우 지인에게 보관을 부탁했다가 환수 조치를 당했다. <월인석보 권 9·10>만 해도 유일본이어서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것이 고(古)미술계의 설명이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대표가 갖고 있던 문화재는 비자금이나 재산 축적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개인적인 취미로 수집해온 소장품으로 보인다. 불법 대출 행위가 파악된 만큼 예보에 통보하고 이들 예술품에 대한 회수 및 매각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보가 서울옥션을 통해 국내외 경매를 추진하는 91점의 작품 중에는 도자기와 불상도 포함되어 있다. 고려청자와 도자기 접시 등 7~8점이다. 예보는 고미술품 전문가들로부터 감정 평가를 받아 이들 예술품의 대략적인 가격을 파악해놓은 상태이다.

예보의 압류품 중에는 고급 수입차 20여 대도 있다. 영업정지된 강원 도민저축은행에서 확보한 물품이다. 현재 경기 하남시의 도민저축은행 창고에 그대로 보관하면서, 유·출입을 막고 있다. 이 수입차들은 6백80여 억원의 배임 혐의로 구속된 채규철 도민저축은행 회장이 대출 과정에서 담보로 잡았다고 주장하는 물품이다. 한 연예인이 1년여 전 도난당한 포르쉐 승용차도 포함되어 있다. 채회장은 스포츠카 운전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살펴보면 화려하다. 대당 최고 40억원에 달하는 스포츠카의 ‘지존’ 부가티 베이론이 있다. 대당 20억원 안팎인 스포츠카 코닉세그, 10억원 안팎인 람보르기니, 4억~5억원 선인 벤틀리 등이다. 중고차라는 점을 감안해도 100억원을 훌쩍 뛰어 넘는 규모이다.

예보는 이 수입차를 전량 경매로 처분하려고 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수입차 딜러 10여 명이 창고로 몰려와 소유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일부 수입차의 경우 차량 등록도 안 되어 있었다. 채회장이 수입차 전문가임을 자처하면서 자동차 딜러들과 가깝게 지냈고 전당포처럼 차량 담보 대출을 해주었다는 것이 예보측의 조사 결과이다. 예보 관계자는 “차량의 실제 소유주를 모두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경매를 통해 불법 대출금을 회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금보험공사가 퇴출 은행으로부터 압류한 고급 차 벤틀리.
예보는 채회장이 가지고 있던 최고급 음향 기기들도 대거 찾아냈다. 채회장 소유의 경기 양평군 시큐어넷 연수원 지하에 보관되어 있었다. 시큐어넷은 경비용역업체이다. 연수원 지하는 가로 1백30m, 세로 23m의 넓은 공간이었다. 1900년대 초 제작된 에디슨 축음기와 1940~50년대 초 유럽에서 제작된 오르간들이 놓여 있었다. 대당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3천만원짜리 프랑스제 유토피아 스피커와 2천만원짜리 덴마크제 오디오, 전축과 스피커 등 음향 기기가 수백 점에 달했다. 벽면에 있는 LP판만 해도 60만장 규모였다.

퇴출당한 저축은행들의 자산 중에는 대형 선박까지 있었다. 부산 계열 저축은행에서만 시가 2천여 억원 규모의 대형 선박 일곱 척을 압류했다. 압류 선박은 벌크선이다. 수프라막스급(4만~5만t)에서 캄사르막스급(8만~9만t)에 이르는 중·대형 규모이다. 척당 약 3백억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보는 벌크선을 매각하기 위해 관련 업체를 선정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올 상반기에 선박 매각 계획을 수립하고 매물로 내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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