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시절의 현대건설, 청와대 정문 '일본식'으로 지었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02.28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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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사·조선총독부 건축 양식과 동일…시민단체, “역사 바로 세우기 위해 즉각 철거” 주장

청와대 정문 돌기둥에 장식된 석등은 우리 전통 양식에 없는 일본식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

청와대는 대한민국의 최고 국가 권력을 상징한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해 있다. 외국 국가원수들이 방한하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청와대는 ‘국격’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청와대의 관문인 정문에는 역사적인 비밀 한 가지가 숨겨져 있다. <시사저널>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청와대 본관으로 통하는 정문과 영빈관 문은 ‘일본식’으로 세워졌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산화한 애국지사들이 알면 통곡할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현재 본관과 영빈관 정문은 철제문 사이에 네 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우고, 그 위를 ‘석등’으로 장식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통 양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문헌에도 없고, 사례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놀랍게도 야스쿠니 등 일본의 신사(神社)에서 흔히 사용하는 양식이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전쟁 전범이 안치된 곳으로 군국주의를 상징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 신궁 정문에 배치된 석등도 닮은꼴이다. 일본 신사에서 석등은 ‘죽은 자를 위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건축 양식은 ‘도리’라고 불리는 정문을 세우고 그 옆에 석등을 배치하는 것이다. 청와대 정문도 이와 비슷하다.

구 본관은 민족 정기 복원 차원에서 철거돼

우리나라에서도 사찰 경내와 능묘에 석등이 설치된 곳이 있으나 정문에는 없다. 또 일본의 신사처럼 쌍등이나 다수의 등을 일렬로 배치하지 않는다. 단 1기만 상징적으로 세울 뿐이다.

그렇다면 청와대 정문이 ‘일본식’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는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와 공동으로 관련 기록들을 샅샅이 찾았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구 통감부) 건물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서울 남산과 경복궁 두 곳에 총독부 청사를 건립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35년 동안 한반도를 강제 점거하면서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수탈하던 총 본산이다. 민족의 한(恨)이 서린 곳이다.

조선총독부의 정문은 지금의 청와대 정문과 거의 흡사했다. 철제 대문 사이로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석등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판박이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7년이 흘렀지만 정작 ‘청와대 정문’은 아직까지 일제의 잔재를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청와대 관저의 유래를 통해 연관성을 찾아보았다. 지금의 청와대는 원래 조선 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했다. 1927년에는 오운각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이곳에 총독 관저를 지었다. 청와대 본관은 이때 자리를 잡았다.

광복 후에는 미군 군정장관이 관저로 사용했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 관저’로 바뀌었다. 이때는 ‘경무대’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지금의 ‘청와대’라는 명칭은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탄생했다. 당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의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가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고 해서 ‘청와대’로 개칭했다. 본관이 화강함 석조에 청기와를 덮었다는 것을 참작해 명명했다.

일제 잔재가 서려 있는 ‘본관’에 대해 역대 대통령들은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청와대 본관을 신축하기로 하고 각계 인사 22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약 2년 뒤인 1991년 9월에 지금의 본관을 신축했다. 우리 고유의 전통 양식을 최대한 살려서 지어졌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 중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 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 청기와 15만장이 들어갔다. 건물 1층에는 대통령 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 연회장, 식당이,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접견실, 회의실이 배치되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는 대대적인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진행되었다. 김대통령은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고, 민족 정기를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구 본관을 철거했다.

청와대 정문에 배치된 석등과 비슷한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석등(왼쪽)과 조선신궁 석등(왼쪽 작은 사진). 조선총독부 정문 석등이 아주 비슷하다(오른쪽).

“우리나라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기왓장 한 장까지 철저하게 부셔 구 본관 지하에 파묻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정작 본관을 다시 짓고 구관을 헐어냈지만 청와대 관문인 정문에는 일제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과거 일제의 강압적 통치로 우리 민족이 수많은 고통을 당했다. 우리나라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청와대에 일본식 석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이다. 즉각 일본식인 청와대 정문과 영빈관 문을 철거하고, 전통식 솟을 대문으로 다시 건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청와대 춘추관과 영빈관, 그리고 본관 등은 현대건설에서 시공했다. 당시 사장과 회장은 현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1977년 이대통령이 사장에 취임한 후 그해 9월부터 현대건설은 영빈관의 설계와 시공을 맡았고, 이듬해 연말에 준공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9월에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에도 현대건설에서 맡았는데, 이때 이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청와대측은 “(정문) 건축과 관계된 사실관계를 유관기관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 뒤에 자세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정확한 답변을 유보했다. 한편, 청와대 정문 맞은편의 경복궁 신무문에서 보면 청와대 본관과 정문이 경복궁과 축이 틀어져 있어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천안문과 자금성의 축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는 조선 시대의 궁궐 창덕궁이 있다. 사적 제122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덕궁 입구에는 일본식 석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청와대 정문과 마찬가지로 돌기둥 위에 석등을 얹어놓은 형식이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문화재청에 “전통 양식이 아니므로 철거해야 한다”라며 1월26일자로 공문을 보내 철거를 요청했다. 문화재청은 ‘전통 방식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고 2월13일에 철거했다. 문화재청은 철거에 앞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했다. 자문 결과 일제 강점기 이전의 전통 양식에서는 석등 2기가 배치된 경우는 없었던 것을 확인했다. 반면, 일본 사찰에서는 쌍등 형식이 보이고 있으며, 신사에서는 입구에 두 줄로 늘어선 석등이 다수 있다는 결론을 냈다. 이런 근거에 의해 철거를 결정한 것이다.

문화재청측은 “1970년대 궁궐 주변 정비를 위해 설치한 펜스의 일부로, 임의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물은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자문위원의 의견이 있어 철거하도록 조치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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