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에 덮인 ‘현대전자 주가 조작’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2.02.28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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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로 현대가 2세 개입 사실 드러나…이익치 회장만 처벌해 ‘꼬리 자르기’ 의혹

1998년 터진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왼쪽)과 현대중공업 최대 주주인 정몽준 의원. ⓒ 시사저널 이종현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자서전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지난 1998년 터진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역시 다시 주목되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은 2008년 5월부터 11월까지 2천2백여 억원을 투입해 현대전자의 주가를 끌어올렸다. 비슷한 시기 정주영 회장과 2세들은 보유 주식을 팔아 천문학적인 시세 차익을 거두었다. 검찰은 ‘박철재 현대증권 상무와 이 전 회장이 주가 조작을 주도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대법원도 지난 2003년 12월 박씨와 이 전 회장에 대해 각각 징역 1년6개월과 2년, 집행유예 2년과 3년을 확정 판결했다.

하지만 법원 판결은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겼다. 법원이 주가 조작에 관여한 임원의 혐의는 인정하면서, 시세 차익을 거둔 현대가 2세들은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 상고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정주영 회장과 현대가 2세들이 주가 조작 기간 중에 주식을 고가에 처분한 사실이 엿보인다’라고 지적했다. 1999년 검찰 수사 당시 작성한 현대그룹 기획조정실의 대책 문건에도 오너 2세가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오너 2세까지 수사를 확대하지 않고 덮었다.

법원 역시 이회장과 박상무에게만 유죄를 확정했다. 이익치 회장은 지난 2월22일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구속된 박상무가 나에게 주가 조작을 지시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박상무는 계열사 주식 매매에 관여할 수 없는 위치였다. 박상무가 풀려나오자마자 현대중공업 임원으로 옮긴 정황을 감안하면 정몽준(MJ) 의원이 배후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2009년 초 검찰 조사를 앞두고 정주영 회장을 만난 일화를 공개했다. 당시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현대중공업이 2천억원을 동원해 현대전자 주식을 매수하고, 사실상 회사의 주인인 MJ가 고가에 매각해 수십억 원의 시세 차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본부 차원에서 연일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전 회장도 당시 변호사들과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 새벽 4시께 정주영 회장의 비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5시 반까지 청운동 자택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청운동에 도착하자 정주영 회장은 “이회장, 몽준이 좀 살려줘. 몽준이 대신 하루만 갔다 와”라고 부탁했다.

이익치 회장은 자기가 신처럼 모시는 정주영 회장과 그 2세들의 짐을 모두 짊어지기로 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현대전자 주가를 관리하라고 지시한 것이 맞다’라고 진술했다. 이미 판이 짜여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회장은 “나중에 박상무의 지시를 받고 현대전자 주식을 거래한 현대증권 도봉지점 실무자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검찰 조사에서 ‘이회장 지시를 받고 현대전자 주식을 매각했다고 불라’라는 종용을 받았다고 들었다. 내가 입만 맞추면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의 꼬리 자르기가 가능했기에 정회장이 나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정몽준 의원측은 “이 전 회장 단독 범행” 주장

<시사저널>이 입수한 당시 현대그룹 구조본의 대책 문건을 보면 정씨 일가가 주가 조작에 개입한 정황이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현대 구조본 관계자가 1999년 4월13일 법무법인 변호사와 함께 진행한 대책회의에서는 ‘개인 대주주와 법인의 연결 매매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정 매매로 추정된다’고 언급되어 있다. 4월19일에는 검찰 조사에 대비한 정몽준 의원의 발언까지 상세하게 적은 ‘MJun(MJ) 고문 진술 요지’라는 문건까지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MJ측은 “다 지나간 일이다. 근거 없는 허위 주장으로, 대꾸할 가치도 없다”라고 해명했다.

정몽준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은 국민투자신탁 인수 등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실화된 현대증권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이씨가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이다. 16대 대선 직전인 2002년 10월27일에도 이씨는 ‘정몽준 의원이 주가 조작에 개입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정의원은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이후에도 항고, 재항고가 이어졌으나 2005년 10월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리되었다. 앞서 관계자는 “선거철을 앞두고 이씨가 또 다시 현대전자 주가 조작 문제를 꺼낸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할 경우 법적 조치 등 단호하게 대응할 계획이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대가 2세들이 주가 조작에 개입한 사실은 이미 대법원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현대전자의 주가 조정 목적이 정씨 일가나 계열사의 주식을 처분한 것이어도 주가 조작을 지시한 이회장의 혐의는 부정할 수 없다”라면서 이 전 회장에게만 유죄를 선고했다.

검찰 역시 사건을 축소한 정황이 엿보인다. 임양운 서울지검 3차장은 지난 1999년 9월 기자들 앞에서 수사 진행 상황을 브리핑했다. 임차장은 당시 “2세 개입이 있었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윗선 개입은 드러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수사팀이 입수한 현대그룹 대책 문건을 묻는 질문에도 “실무자들이 증권거래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를 변호사와 상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이 와전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 전 회장은 ‘검찰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현대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주가 조작에 관여한 이회장은 처벌을 받았다. 관련 소송도 잇따랐다. 최근에는 현대증권 소액 주주로부터 70억원 규모의 소송까지 당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주가 조작을 통해 실제로 이익을 얻은 현대가 2세들은 무혐의로 처리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는 “주가 조작 외에 개인적으로 횡령한 혐의는 추가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만 유죄를 선고받고, 거액의 시세 차익을 거둔 오너 2세들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국민투자신탁 주식 매입 둘러싼 ‘각서 사건’ 전말 

1997년 현대그룹은 투자신탁업에 진출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는 국민투자신탁증권(현 한화투자증권)의 주식을 사들였으나 출자 총액 제한에 걸려 그 주식을 되팔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임페리얼상업은행(CIBC)에 주식을 팔았다. 3년 후에 일정 가격으로 다시 매입하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3년 후 현대전자가 주식을 되사려 하니 외환 관련법에 저촉되었다. 현대전자는 현대중공업에게 CIBC로부터 주식을 매입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은 손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이 공동으로 현대중공업에게 각서를 써주었다. 손해가 발생하면 보전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각서를 받고 현대중공업은 2000년 CIBC에 2억2천만 달러를 주고 주식을 사들였다. 그러나 주가가 떨어져 현대중공업이 손실을 입었다. 현대중공업은 각서를 써준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각서대로 금전적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이다. 대법원 상고심 재판부는 ‘현대전자는 2천1백18억원을, 현대증권은 9백91억원을 현대중공업에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현대증권은 현대중공업에게 지불한 9백91억원을 배상하라며 현대전자에 소송을 걸었다. 그러자 현대전자도 현대증권을 상대로 맞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2011년 현대증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대전자는 현대증권에 9백91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현대전자가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참여연대가 2000년 8월 이익치 전 현대증권 대표를 배임죄로 고발했다. 각서를 작성해 현대증권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였다. 이 일로 이익치 회장은 2009년 7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이회장은 “현대증권이 현대전자로부터 9백91억원을 돌려받아 이 사안으로 대표이사인 내가 회사에 끼친 손해가 없다. 이에 따라 배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판결이 나기 전에 법원은 나를 구속했다. 나는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중공업의 최대 주주는 정주영이었다. 나는 정주영과 정몽헌의 지시를 받고 각서에 도장을 찍어준 것뿐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정몽헌은 나에게 일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정몽헌은 보유하고 있던 현대전자 주식 8백만주를 현대중공업에 주겠다는 확약서까지 보냈다. 돈이 목적이 아니고 다른 음모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현대중공업은 이를 거부했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밝힌 정주영·현대가 비화 관련 기사]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1)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2)

   “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3)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이익치 전 회장 인터뷰 "난 리틀 정주영 10만명 양성이 꿈이다"

   끝나지 않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현대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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