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현대그룹 흔든 막후 정치 권력 있었다”(1)
  • 이철현·이석 기자·홍재혜 인턴기자 ()
  • 승인 2012.02.28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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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동안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보좌했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정회장과 관련한 비화들을 <시사저널>에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는 정회장으로부터 ‘이비서’라고 불릴 만큼 정회장의 신임을 받았고, 그룹 2대 총수였던 정몽헌 회장과도 가까웠다. <시사저널>은 이 전 회장이 지난 2009년 7월부터 13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에서 작성한 자필 원고의 한글 파일을 단독 입수했다. 여기에는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현대가 형제들의 ‘왕자의 난’, 정몽헌 회장의 자살 등 굵직한 사건들과 관련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공개한다.

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관련한 비화를 털어놓은 이익치 전 회장. ⓒ 시사저널 임준선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지난 1970년부터 2001년 3월 영면할 때까지 이익치 전 현대증권 대표이사 회장(69)을 ‘이비서’라고 불렀다. 이익치 전 회장은 1969년 3월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그 이듬해 회장 비서실로 발령 났고 1986년까지 비서를 지냈다. 1987년 현대중공업 전무이사, 1994년 현대해상화재보험 부사장, 1996년 현대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비롯해 현대그룹의 핵심 업무를 추진하면서 정주영 회장과 그의 넷째아들이자 그룹 2대 총수인 정몽헌 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이 전 회장은 대북 송금과 현대 비자금 사건,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자살, 왕자의 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에 직·간접으로 관련 있고 금강산 관광 사업, 국민투자신탁(현 한화투자증권) 인수,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을 주도했다. 그렇다 보니 그는 정주영 회장과 그 일가와 관련한 의혹과 소문의 실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런 이익치 전 회장이 지난 12년 동안 지켰던 침묵을 깼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말 조만간 출간할 목적으로 자서전 초벌 원고를 완성했다. <시사저널>은 이 전 회장이 지난 2009년 7월부터 13개월 동안 징역형을 산 의정부교도소에서 작성한 자필 원고를 한글로 정리한 파일을 단독 입수했다. 이어 지난 2월22일 서울 중구 장충동의 한 음식점에서 이익치 전 회장을 만나 4시간에 걸쳐 인터뷰했다. 이익치 전 회장은 지난 12년 동안 밝히지 않았던 금강산 관광 사업,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왕자의 난’, 정몽헌 회장 자살을 비롯한 갖가지 의문점 등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았다. <시사저널>은 자서전 핵심 내용과 이 전 회장의 인터뷰를 가감 없이 보도한다.

■ 정주영 회장이 푸틴 제치고 금강산 관광 사업권 따낸 막후

1998년 12월15일 방북 기자회견을 하던 당시의 정주영 명예회장. ⓒ 시사저널 사진팀
김정일 위원장 “제가 처녀입니다.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드리느냐, 푸틴 대통령에게 주느냐 생각하다가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주기로 했죠.”

정주영 회장은 지난 1997년 금강산 관광 사업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넷째아들이자 그룹 차기 총수로 점찍은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이 그 중책을 맡았다. 정몽헌 회장은 계동 사옥 15층에 자리한 그룹 명예회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이익치 사장에게 “북한과 연결 고리를 찾아봐라”라고 지시했다. 이익치 사장은 서울 여의도 소재 현대증권 사장실로 돌아와 박정두 고문에게 상의했다. 박정두 고문은 김영삼 대통령의 외신 담당 고문 출신으로 당시 현대증권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고문은 친분이 두터운 고바야시 게이지 전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을 소개했다. 고바야시 전 지국장은 김용순 당시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세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과 연결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고바야시는 일본 큐슈 국제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5공 신군부’에 항의해 20일 이상 단식 농성을 벌이는 사실을 기사화해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고바야시는 현대측 위임장과 금강산 개발 계획서를 ‘금강산 개발은 현대가 가장 적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김용순 위원장 앞으로 보냈다. 하지만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아무 응답이 없었다. 고바야시는 요시다라는 인물에게 북한 인사와 접촉해 사정을 파악해달라고 부탁했다. 요시다 씨는 북한과 일본을 오가며 식자재나 잡화를 취급하는 무역업자였다. 그러자 북한으로부터 ‘교섭을 하고 싶다’는 답장이 왔다. 수십 차례 연락을 주고받다가 1998년 1월 싱가포르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 고바야시 교수를 비롯해 현대측 협상 관계자가 채비를 갖추고 호텔까지 예약했다.

하지만 면담 날짜 이틀 전 북한이 돌연 약속을 취소했다. 정몽구 회장 밑에서 일하는 차정식 전무가 북한측에 ‘몽헌 그룹과의 교섭은 현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팩스를 보냈다. 정몽구 회장은 부하 차정식 전무를 중국에 상주시키며 컨테이너나 철도 차량 합작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광명성경제연합회 대표와 협의하고 있었다. 이에 사정을 알 수 없는 북한측이 회합을 취소했다. 정주영 회장이 박세용 그룹기획조정실장과 이익치 사장을 북한에 보내 ‘북한과의 교섭 책임자는 몽헌이다’라고 통보했다. 이로 인해 당초 일정보다 2주 늦어져 2월24~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첫 만남이 열렸다.

정몽헌 회장(앞줄 왼쪽 세번째)과 강종훈 아태평화위원회 서기장이 1998년 6월 금강산 관광 사업 계약서에 서명할 때 이익치 회장과 정주영 회장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시사저널 사진팀

현대그룹의 대북 창구는 정몽헌 회장으로 일원화되었다. 서울은 김윤규 현대건설 부사장, 베이징은 김고중 현대종합상사 전무가 연락 창구로 지정되었다. 현대측에서는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 김윤규 부사장, 김고중 전무가 참석했다. 북한측에서는 송호경 아세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 김봉익 광명성경제연합회 회장, 이재철 광명성 베이징 대표, 황청·김창순·이재상 아태참사가 참석했다. 첫 면담을 주선한 고바야시와 요시다도 참석했다. 그 뒤로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며 실무 협상이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40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협상단과 기술진이 고려항공을 전세 내 평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당초 기대와 달리 협상은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협상 창구가 중첩되다 보니 아세아태평양위원회 인사와 합의해도 다른 부서 합동회의에서 부결되기도 했다. 중구난방으로 협상이 진행된 탓에 현대측 협상단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전원 귀국했다.

현대측 협상단이 평양 철수로 노린 것이 있었다. 협상 중단 사유와 현대측 요구가 무엇인지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될 것이라 판단했다. 협상단은 평양에서 철수하기 전에 현대측 요구사항을 북한에 서면으로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협상 실무단을 이끈 김윤규 부사장의 역할이 컸다. 아침 8시에 시작해 새벽 3시에 끝나는 협상을 반복하면서도 김부사장은 지치지 않았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결정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는 사회였다. 김위원장은 지지부진한 협상 주제를 바로 결정했다. 김위원장은 현대측 협상단과 4시간 면담을 갖고 개성공단 지정, 금강산 골프장 건립 같은 까다로운 협상 난제를 바로 결정했다.           

정주영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1998년 10월 소 5백마리를 몰고 올라가는 2차 방북에 앞서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실무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정회장은 1998년 6월16~23일 소 5백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6월16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현대측 일행을 맞이한 자리에서 “제가 처녀입니다.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드리느냐,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주느냐 고민하다가 정주영 회장 선생에게 주기로 했죠”라고 말했다. 금강산 사업 합의서가 체결되기 며칠 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박2일 일정으로 평양을 다녀갔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북한에 수십 년 동안 천연가스를 무상으로 공급하겠다는 제의를 했다고 한다. 김위원장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는 사전 예고도 없이 북한 원조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김위원장은 ‘북한이 러시아가 보내준 천연가스에 의존하다가 옛날처럼 갑자기 가스 공급관을 잠가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하며 거절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실행하려면 해결해야 할 난제가 쌓여 있었다. 남한 관광객이 금강산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쪽 군사분계선은 유엔군 사령부 관할이고 북측은 강경 군부가 막고 있었다. 금강산 근처에 국제공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결책은 정몽헌 회장이 제시했다. 현대상선 회장답게 크루즈 선박으로 관광객을 실어나르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4.5t짜리 크루즈여객선이 닿을 수 있는 항만 시설이 금강산 주변에는 없었다. 원산항은 100㎞가 넘었다. 금강산과 가장 가까운 고저항은 조그만 어항에 불과했다. 금강산과의 거리도 40㎞나 떨어져 있었다. 현대 기술진은 금강산과 가까운 만에 장전항이라는 군사 시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전항은 당시 북한 해군의 잠수함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세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나 북한 군부가 장전항을 크루즈 여객선이 들고 날 수 있는 항구로 개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현대측이 ‘그러면 못하겠다’고 나서자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의 반발을 제압하고 장전항의 용도 변경을 허락했다.

정회장은 5개월 안에 장전항 공사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현대건설 기술진이 하루 24시간 돌관 공사를 진행해 5개월 만에 완공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5개월 만에 완공된 장전항을 보고 놀랐다. 김위원장은 장전항 완공 현장에서 북한측 고위 관료와 현대측 인사와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이거 너희(북한측 인사)에게 맡겼으면 2~3년 걸렸겠지. 현대 선생들 대단하구만”이라고 말했다.    

■ 신의주·남포 아니라 왜 개성공단 탄생했나

정주영 회장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정몽구·정몽근·고 정몽헌·정몽준 형제(왼쪽부터). ⓒ 문화일보제공
김정일 위원장 “내가 정몽헌 회장 선생에게 개성공단을 선물로 드리겠소.”

정주영 명예회장, 정몽헌 회장, 이익치 사장은 지난 2000년 6월29일 새벽 머무르고 있던 평양 백화원 국빈 숙소를 떠나 원산행 비행기를 탔다. 원산항에 위치한 북한 해군 기지 안에 있는 별장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CNN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김위원장은 일행에게 물었다. “아태위원회가 제의한 신의주공단 개발 사업은 내가 추천했다. 신의주가 중국과 가깝고 인력을 구하기 쉽다 보니 공단이 들어서기에 최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현대 회장 선생들이 반대하고 개성공단을 요청한다고 하니 현대측 말을 듣고 싶다.”

현대측은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이 있기 전에 신의주와 남포를 실사했다. 먼저 아태위원회로부터 요청을 받고 신의주공단 사업을 검토했으나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남포공단도 답사했다. 평양에서 내륙으로 60㎞ 떨어진 산속에 굴을 뚫고 그 속에서 장비를 생산하고 있으니 그곳을 활용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조사를 벌였으나 역시 타당성이 없었다. 정몽헌 회장은 개성공단 사업을 제안했다. 개성에 가공 공장을 짓고 남쪽에서 부품을 가져와 북한의 저임금을 이용해 조립하고 다시 남쪽으로 가져와 인천이나 부산 항구를 이용해 제3국으로 수출하자는 계획이었다. 새 공단에서 만들 제품이 중국산과 겹치는 품목이 많다 보니 중국 수출이 여의치 않을 것이므로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신의주의 장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제품을 남쪽으로 가져와 수출해야 하므로 남쪽과 가까운 것이 오히려 낫다.

또, 공단은 전력 사용량이 많아 남쪽에서 전력을 끌어다 써야 했다. 북한의 전력 사정이 여의치 않은 탓이다. 이익치 회장이 설명을 마치자 김정일 위원장은 “내가 오늘 정몽헌 회장 선생에게 개성공단을 선물로 주겠소. 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말했다. 다음 날 오전 7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의전용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개성으로 바로 내려갔다. 정몽헌 회장 일행은 개성공단 부지 2천평을 선물받고 평양에서 개성공단 후보지를 지나 판문점을 경유해 계동 현대 사옥에 도착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과 청구권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수탈당한 재산권에 대한 보상과 징병, 징용 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포괄적인 배상으로 100억 달러를 청구한 것이다. 북한은 노나카 일본 내각에 차관 수백 억 달러도 함께 요청했다. 김위원장은 이 자금을 경제 개발에 쓰고자 했다. 김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일본에서 곧 돈이 들어오면 우선 김책제철소 설비부터 고치려 한다. 이 자금을 활용해 경제 개발이나 산업화에 아껴서 쓰고자 하니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위원장의 기대와 달리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북한에 호의적이던 노나카 내각이 물러나고 대북 강경파 내각이 들어섰다. 그 뒤로 일본인 납치 사건이 부각되면서 협상이 중단되고 북한 핵개발 이슈가 중첩되면서 북·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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