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키기에는 너무 깊이 ‘잘못된 믿음’도 전염된다
  • 전우영│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
  • 승인 2012.03.1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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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출장한 박주영에게 동료들이 패스하기 꺼려한 이유

ⓒ honeypapa@naver.com

박주영 선수의 소속팀인 잉글랜드의 아스널은 2011-2012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이탈리아의 AC 밀란과 맞붙었다. AC 밀란의 홈에서 치러진 1차전에서 아스널은 0-4로 크게 졌다. 2차전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축구 경기에서 한 골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감안한다면, 승부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2차전에서 홈으로 AC 밀란을 불러들인 아스널은 엄청난 속도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스널은 전반전에만 세 골을 터뜨렸다. 45분 만에 AC 밀란을 3-0으로 앞서나갔다. 후반전 45분 동안 한 골만 더 넣으면,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반전 결과만 놓고 보면, 두 골을 더 넣어서 또 하나의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축구에서 한 골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반 들어 골은 터지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갔다. 아스널을 응원하던 팬들은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 때문에 애가 탔지만, 우리나라 팬들은 박주영이 그라운드에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더 답답했다. 박주영은 교체 선수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후반전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드디어 후반 38분, 월콧이라는 선수가 부상을 당하자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은 박주영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박주영은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7분의 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렸다. 추가 시간으로 3분이 주어졌다. 드디어 아스널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AC 밀란의 공을 가로챈 아스널은 빠른 역습을 시도했다. 박주영을 포함한 아스널의 공격수들은 AC 밀란의 진영을 향해 달려나갔다.

박주영, 5개월 동안 고작 다섯 경기 출전

공을 잡은 카메룬 출신의 알렉산드로 송은 순간적으로 아스널의 공격수들 중에 누구에게 패스를 할지 살피고 있었다. 중앙에는 제르빙요와 샤막이 서 있었고, 그 뒤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선두를 단독 질주하고 있던 반 페르시가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는 AC 밀란의 수비수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박주영은 왼쪽 측면의 빈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AC 밀란의 수비수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상태였다. 박주영과 중앙 쪽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던 송은 제르빙요와 반 페르시가 있는 중앙을 향해 패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패스의 방향을 미리 예측하고, 진영을 갖춘 채로 기다리고 있던 AC 밀란 수비수들에 의해 송의 패스는 쉽게 차단되고 말았다. 아스널의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버렸다. 결국 아스널은 두 경기 전체 스코어에서 3-4로 AC 밀란에 패하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 송의 패스가 AC 밀란 수비수들에 의해 차단되었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격하게 불만을 드러내는 아르센 벵거 감독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의 불만이 정확히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벵거 감독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벵거 감독의 제스처는 송의 선택에 대한 불만처럼 보였다. 특히 박주영에게 공이 연결되기를 고대하며 위성중계를 시청하던 우리나라 팬들에게는 벵거의 불만이, 상대 수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던 박주영에게 패스를 하지 않은 송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송의 선택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을까?

2011년 8월30일, 박주영이 프랑스의 AS 모나코에서 아스널로 이적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당시만 해도 빈 공간을 점유한 박주영에게 패스를 하지 않는 상황이 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3년간의 AS 모나코 시절, 혼자서 공격을 이끌었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박주영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아스널에서도 두 번째로 출전한 볼튼과의 칼링컵 16강전에서 데뷔골이자 결승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와의 챔피언스리그 32강전에 선발 출전했다가 후반 15분 교체된 뒤로 박주영에게는 출전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적한 2012년 8월30일부터 2012년 1월23일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박주영은 칼링컵 세 경기, 리그 한 경기, 챔피언스리그 한 경기를 포함해서 단 다섯 경기에 출전했을 뿐이다. 그것도 풀타임으로 뛴 경기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이번 시즌에 아스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리그 경기에는 이적 후 약 5개월 만에 경기 종료 8분을 남기고 교체 선수로 뛰었을 뿐이다.

선수들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하게 된다. 패스했을 때 공을 빼앗기지 않고, 골을 넣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선수에게 패스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시간이 종료되기 직전에 단 한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았을 때처럼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농구 경기에서 단 한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았을 때, 팀에 마이클 조던이 있다면 마지막 패스는 조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선수들 간의 믿음은 경기를 함께 뛰는 과정에서 생긴다. 서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함께 상대를 대적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여가는 것이 동료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아스널에서 박주영에게는 동료들과 믿음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믿음은 전염되는 것이다. 특히, 팀을 이끄는 리더인 감독이 특정 선수에게 보여주는 믿음은 다른 선수들에게 매우 쉽게 전염된다. 박주영에 대한 벵거 감독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는 박주영의 경기 출장 기록을 통해서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박주영은 아스널에서는 경기에 거의 나서지 못했지만, 그 기간 동안 국가대표팀 경기에서는 거의 매 경기마다 골을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경기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박주영의 이러한 시위(?)에도 벵거 감독은 박주영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다.

아내가 남편을 믿지 않으면 자식들도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게 돼

마지막 한 번의 기회에서 알렉산드로 송이 박주영을 외면하고 다른 선수에게 패스한 것은 바로 박주영에 대한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박주영에 대한 송의 믿음을 약화시킨 사람은 송이 아니라 바로 벵거 감독이라는 것이다. 출장 기회를 거의 박탈함으로써 동료 선수들과 믿음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서 동료들은 벵거 감독이 박주영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만약 벵거 감독의 불만스러운 제스처가 송이 박주영에게 패스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면, 벵거 감독이 화풀이를 해야 할  대상은 사실  알렉산드로 송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

믿음이 전염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내가 남편을 믿지 않으면, 자식들도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면, 자식들은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를 존중하는 마음은 약해진다. 자식이 성장해서 결혼한 후에 배우자 앞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버지나 어머니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버지(어머니)가 어머니(아버지)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자신은 남편이나 아내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내가 무시한다고 해서 너희들도 그러면 안 된다”라고 자식들에게 훈계하는 것은, 벵거 감독이 박주영을 외면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경기에 투입하고 난 다음에 다른 선수들에게 “왜 박주영에게 패스를 안 하느냐”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빨리 전염되는 것이다. 

전우영│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심리학의 힘 P: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11가지 비밀>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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