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광물’ 규제에 속 타는 기업들
  • 최연진│한국일보 산업부 기자 ()
  • 승인 2012.03.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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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사용 금지 대상에 수입 부품도 포함돼…IT 전자업계, 광물 물량 확보에 비상

콩고의 북동쪽에 있는 한 광산에서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금·탄탈 등 광물이 섞인 원석을 나르고 있다. ⓒ REUTERS

요즘 IT 전자업계에서 소리 없이 일고 있는 뜨거운 이슈가 있다. 바로 분쟁 광물이다. 오는 6월 이후 아프리카 주요 분쟁 지역에서 채굴된 광물을 사용한 정보기술(IT) 기기와 전자제품의 판매가 미국 내에서 힘들어진다. 지난해 미국이 분쟁 광물을 규제하는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도체 액정 디스플레이(LCD), 배터리 등 IT 제품의 핵심 부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국내 IT 전자업계도 타격을 입게 되어 초비상이 걸렸다.

분쟁 광물이란, 내전 등 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생산되는 광물을 말한다. 이 경우 정상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고 반군 등이 민간인이나 포로들을 강제로 동원해 노예 노동으로 광물을 채취한 뒤 이를 팔아서 무기를 사들이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흔히 ‘블러드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아프리카산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탄탈로 통하는 탄탈륨, 텅스텐, 망간, 게르마늄 등이 대표적 분쟁 광물로 꼽힌다.

미국 정부는 미국 기업들이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수단, 우간다, 르완다, 브룬디, 탄자니아, 잠비아, 앙골라, 콩고 등 아프리카 아홉 개 분쟁 국가에서 생산하는 탄탈·텅스텐·주석·금 등 네 가지 광물을 이용해 만든 부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미국 의회는 지난해 금융규제개혁법 1502조를 통과시켰고, 미국 정부는 6월 말까지 시행령을 마련해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미국 증시에 상장된 모든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부품에 들어간 광물의 원산지를 의무적으로 공개하고, 분쟁 지역 광물 사용 여부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고해야 한다. 미국 정부의 직접적 규제 대상은 미국 기업이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회사에 부품을 공급하는 외국 기업들도 모두 적용을 받게 된다.

미국 내 전자·자동차·항공·방위산업 업체에 공급하는 한국의 반도체, LCD, 배터리, 전자부품도 광물 원산지를 밝혀야 하고 분쟁 지역에서 생산한 광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미국 애플, IBM, 델, HP 등 25개 기업들은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LG디스플레이 등에 광물 사용 현황을 올해 초 요청한 상태이다.

D램 등의 재료인 탄탈, 80%가 콩고산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생산 현장. 탄탈은 배터리 제조에도 핵심 광물로 쓰인다. ⓒ LG화학 제공
문제는 광물의 원산지를 밝히는 일이다. 광물의 원산지 확인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광물은 워낙 유통 경로가 복잡해 원산지를 알기 힘들다. 분쟁 지역 광물의 경우 불법 채굴 여부는 더더욱 알기 어렵다. 무엇보다 광물의 이력이 추적되지 않아, 어느 지역에서 채굴된 광물인지 여부를 확인하기가 아주 어렵다. 전자업체들은 일부 광물 중개상들의 원산지 세탁이 워낙 심해서 국내에서 쓰이는 광물의 원산지 확인이 어렵다. 확인된다 하더라도 분쟁 광물이 국내에서 얼마나 쓰이는지 물량을 파악할 방법이 없다. 여러 업체와 거래하는 대기업들은 더더욱 골치이다. 수많은 중소기업에게 하청을 주고 이들에게서 각 부품을 공급받는데, 하청업체들이 분쟁 광물을 사용하는지 여부를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 보니 광물의 원산지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IT 전자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은 탄탈이다. 탄탈은 보통 콩고산 콜탄이라는 원석에서 뽑아낸다. 콜탄은 콜롬보와 탄탈이 함유된 광석인데, 이를 제련해 탄탈을 뽑아낸다. 전세계 콜탄 공급의 80%가 콩고산이다. 그런데 콩고 정부가 채굴하는 콜탄보다 투치족 등 반군이 르완다 출신 후투족 포로 등을 강제 동원해 채굴한 광석이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반군은 콜탄을 팔아서 번 돈으로 무기를 구입한 뒤, 이 무기를 ‘와토토’라고 불리는 콩고 반군 소년병들에게 지급한다. 반군들은 심지어 10세 미만 어린 아이까지 와토토로 끌어들인 뒤, 이들에게 마약을 투여하며 전쟁에 투입한다. 세계 인권 단체는 콩고 지역에서 나오는 탄탈을 강제 노동으로 채취한 ‘블러드 다이아몬드’ 못지않게 규제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분쟁 지역 광물을 규제하려는 것도 인종 학살, 노예 노동으로 이어지는 반군의 내전 자금을 차단하겠다는 취지이다.

탄탈은 이렇게 추악한 과정을 통해 채취되지만,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소재이다. 각종 반도체는 물론이고 중앙 처리 장치(CPU), 휴대전화 안테나, 원자력발전기, 현미경과 디지털카메라, TV, 전투기, 자동차에까지 쓰인다. 수요는 다양한데 공급량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일부 기업들은 콩고 반군들과 밀거래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제품에 들어간 광물의 원산지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도체 D램에는 탄탈이 중요한 재료로 쓰이고 있다. ⓒ 하이닉스반도체 제공

유럽도 규제 움직임…정부 차원 대책 세워야

이같은 분쟁 광물 규제 움직임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일고 있다. 유럽의 경우 인권 단체나 시민단체 등에서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이번 분쟁 광물에 대해서도 민간 단체 중심으로 규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아예 관련 제품의 유통을 막아야 분쟁 광물이 근절된다고 보고 이를 유럽연합(EU) 내에서 공론화 할 기세여서 이미 세계적 이슈로 커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계 각국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소니·토요타 등 일본 기업들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부품 협력사들과 연계해 분쟁 지역 광물을 걸러내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도 워낙 급한 발등의 불이 되다 보니 나름으로 대책을 찾고 있다. 삼성의 경우 다른 글로벌 기업들처럼 미국 공공 및 민간협의회(PPA)에서 진행하는 광산 인증 프로그램과 세계전자산업시민연대(EICC)에서 인증한 분쟁 광물 미사용 제련소에서 나오는 광물만 사용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EICC에서 인증한 분쟁 광물 미사용 제련소는 중국 F&X, 미국 엑소테크, 일본 미츠이, 러시아 솔리캄스크 등 총 10군데이다. 즉, 해당 제련소는 EICC에서 광물의 원산지 추적을 통해 분쟁 광물을 사용하지 않는 곳으로 인증한 만큼 여기서 나오는 광물을 사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LG전자도 EICC와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부품 공급사 및 중소기업들은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분쟁 광물 규제 움직임은 소비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각 제조업체들이 PPA와 EICC의 인증을 받은 광산과 제련소에서 나온 광물만 사용할 경우 필요량을 채우기 힘들다. 이번 규제로 전세계 IT 전자업체들이 문제가 없는 광산과 제련소로만 몰리면 물량 확보에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다 보면 광물 가격이 치솟으면서 덩달아 부품 가격이 오를 수 있다. 각종 부품 가격의 상승은 고스란히 제품 가격으로 전이되어 가격 인상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또 광물 공급량이 필요량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점도 심각한 부작용이다. 그렇게 되면 제품 출시 시기에도 영향을 미쳐 제품이 시장에 제때 공급되지 못하면서 마찬가지로 가격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 차원의 대책은 전혀 마련되지 않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다. IT 전자업체들은 일개 기업이 대처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들여다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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