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 판매’에 발 묶인 한국 정치
  • 안동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 승인 2012.03.27 00: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품 판매 방식 중 하나로 묶음 판매 또는 결합 판매라는 것이 있는데, 영어로는 ‘번들링(bundling)’이라고 한다. 묶음 판매란 여러 개별 상품을 묶어서 패키지(package)로 판매하는 행위이다. 자동차를 구매할 때 선택해야 하는 옵션 패키지가 대표적인 예로, 가죽 시트를 추가하고자 할 경우 개별적으로는 구매할 수 없고 가죽시트와 고급 오디오가 패키지로 묶여 있는 옵션을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개별 구매가 불가능한 경우를 순수 묶음 판매(pure bundling)라고 한다. 또 다른 예로, 마이크로소프트가 판매하는 워드나 엑셀은 개별적으로 구매할 수도 있고 오피스라는 패키지로 일괄 구매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 패키지로 사면 개별적으로 구매하는 경우보다 할인이 된다. 이를 ‘혼합 묶음 판매(mixed bundling)’라고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묶음 판매는 소비자를 약탈해 기업의 이윤을 증대시키는 전략이다. 위의 자동차 옵션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가죽 시트를 사기 위해 할 수 없이 고급 오디오를 지불의사보다 높은 가격에 덤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경우 순수 묶음 판매에는 규제가 가해지고, 혼합 묶음 판매는 일정 범위 안에서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당 정치의 가장 큰 특색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묶음 판매, 그것도 순수 묶음 판매 제품밖에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각종 선거에서의 투표 행위도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비 의사 결정과 같다. 유권자는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한다. 특정 정당에 투표를 함으로써 특정 정강 정책을 선택하는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다. 다만 다수결에 따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대상을 소비하도록 강요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대다수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안은 새누리당과 야권 연대를 통한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이다. 이는 경제학적으로, ‘복점 시장(duopoly)’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문제는 각 당의 포지셔닝(positioning) 자체가 극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보니 묶음 판매를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유권자에게 선택의 주요 기준은 대체로 경제 측면과 대북 관계 측면이다. 이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 평면상에서 두 정당의 포지셔닝은 극단에 위치하고 있다.

즉, 한 패키지는 보수주의적 경제 체제와 상호주의에 기반을 둔 대북 정책이고, 다른 한 패키지는 진보주의적 경제 체제에 관용주의적 대북 정책으로 묶여 있다. 이것은 소비자에게 롯데제과의 종합 선물 세트와 오리온제과의 종합 선물 세트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에 소비자는 빼빼로와 초코파이를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다.

지난 10여 년간 각종 선거의 여론조사를 보면 부동층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것은 곧 유권자들 중에 경제와 대북 관계라는 측면에서 개별적 수요를 원하는 층이 많지만, 묶음으로만 구매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의 괴리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존 정당과는 차별화된 포지셔닝을 가진 정치 세력에 대한 수요가 잠재해 있으며, 최근의 안철수 교수 신드롬은 이를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