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발전시켜온 ‘나쁜 것’들의 역사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2.04.03 07:5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쟁·포르노·패스트푸드의 상호 관련성 추적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피터 노왁 지음 문학동네 펴냄 432쪽│1만7천원
혹시 군부대나 군인을 보면서 문명의 발전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혹 그렇게 생각했다면 캐나다의 과학기술 전문 기자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는 10여 년 과학기술에 천착해 글을 써오면서 전쟁·포르노·패스트푸드와 관련한 산업이 현대 문명을 발전시켜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정리한 것이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이다.   

저자는 “인류의 전 역사가 증명하듯 전쟁과 섹스와 음식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업일 뿐 아니라 가장 수지 맞는 사업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게 된 현대에 이르러 전쟁과 섹스, 음식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둘러싸고 거대 산업이 발달했다. 결국 현대 기술 문명의 역사란 이들 ‘나쁜 것들’이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빚어내고 있는 역사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004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패리스 힐튼의 섹스비디오를 본 저자는, 화면에 나온 속살이 밝고 화사한 분홍색이 아니라 온통 에메랄드 빛이었던 것에서 걸프 전쟁을 연상했다.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기에 에메랄드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인데,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유명한 걸프 전쟁의 시작도 온통 에메랄드 빛을 띤 야간 폭격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걸프 전쟁과 섹스비디오 사이의 이 모종의 관계는 그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뿌리 깊은 것이었고, 일종의 필연적인 상호 협력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과 포르노 산업 전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스트푸드 산업 역시 전쟁과 포르노 산업과 함께 현대 기술 문명을 주도하는 한 축으로서 함께 ‘부끄러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저자가 든 예는 이렇다. 오늘날 모든 가정이 구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전자레인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담당했던 레이더 기술이 종전 후 가정용으로 개발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프라이팬인 테팔 프라이팬은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부산물 테프론을 알루미늄 프라이팬에 결합시킨 것이다. 정크 푸드의 대명사이자 한국에서는 ‘부대찌개’라는 하이브리드 식품으로 재탄생한 스팸은 본래 전쟁 중 병사에게 필요한 높은 열량을 공급하고 오랜 기간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개발된 전투 식량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많은 병사의 생명을 살렸다. 초코 우유 분말 제품이나 커피믹스는 전쟁 중 군에 납품할 분유를 만들었던 분무 건조 기술을 바탕으로 태어났다. 웹에 올리는 화상과 동영상 형식의 표준인 JPEG, GIF, MPEG는 <플레이보이>에 실린 한 여성 모델의 누드 사진으로 만들어졌다.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전화로 피자를 주문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은 애초에 폰섹스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저자는 “거대한 기술 창조자인 동시에 장기적인 얼리어답터라 할 수 있는 군은 민간 기업에서 맡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너무 앞서나가는 장기 연구를 주로 수행함으로써 현대의 기술 발전을 촉진시켜왔다. 비슷한 맥락에서 포르노 산업 역시 얼리어답터로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리고 식품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 중 하나이다.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손님에게 버거를 내놓는 시간을 다만 몇 초라도 줄일 수 있다면, 버거 수백 개를 더 팔 수 있다. 따라서 이 일을 가능하게 해줄 기술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설명했다.

저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현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인류 문명의 자산이 ‘나쁜 것들’을 통해 발전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 세 범주가 각기 독립적이라기보다 상호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포르노의 선정성을 강화하는 카메라 렌즈가 본래 전쟁 물품이었다는 등의 사례를 들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