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핵’의 모범이 된 카자흐스탄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4.03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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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를 핵무기 없는 지역으로 선포하고 실행…핵 원료 은행 설립 아이디어도 내놔 주목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최초의 원자폭탄은 ‘꼬마(Little Boy)’로 불렸다. 3일 후인 8월9일 역시 일본의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암호명은 ‘뚱보(Fat Man)’였다. 2차 대전 말 미국이 투하한 이 두 개의 원폭으로 일본인 20만명이 죽었다. 2차 대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으나 원폭 사용의 정당성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과학자협회의 추산에 따르면 인류가 보유한 핵탄두는 2011년 현재 2만5백개이다. 이중 4천8백개는 실전에 배치되어 있다. 혹시 핵전쟁이 일어나 이 핵탄두들이 폭발한다면 인류는 전멸한다. 꼬마와 뚱보가 자라고 자라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2012년 현재 핵을 보유한 것으로 공인된 나라는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인도·파키스탄 일곱 개국이고 북한은 여덟 번째로 핵 보유국이 되었다. 이스라엘도 핵을 가진 것으로 짐작되지만 공식적으로는 부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핵 보유 직전까지 갔으나 스스로 포기했다.

2010년 4월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손을 맞잡은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 EPA연합

구소련에 속했던 시절 핵실험장이었던 국가

마침 서울에서 53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려 핵물질을 감축하고 핵무기가 테러리스트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가 실현될지는 의문이다.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2년 전 워싱턴에서도 유사한 합의가 있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없었다. 9·11 이후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양대 요인은 북한과 이란의 핵이다. 이들 두 나라가 ‘불량 국가(rogue state)’이기 때문이다. 불량 국가는 국제협약을 준수하지 않는다. 정권 유지에 필요하다면 핵을 사용하고 누구에게나 핵을 판매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불량 국가이다. 북한과 이란의 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핵 재앙의 피해는 일본처럼 핵폭탄 공격을 받았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핵실험으로 인한 피해 또한 심각하다. 인류는 지금까지 총 2천여 회의 핵실험을 했다. 핵실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카자흐스탄이다. 이 나라는 옛 소련 연방에 속해 있던 시절 40년 동안 핵실험장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독립 국가가 되었으나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팅스크 기지에서는 4백60건의 핵실험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백16건은 지상 실험이었다. 이 기지에서 마지막 핵실험이 실시된 것이 20년 전이었으나 그 피해는 아직도 생생하다. 수천 명이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했다. 암 발병률과 기형아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계속 태어난다. 이 비극적 유산은 핵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구출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대한가를 웅변으로 증언한다.

카자흐스탄 국민들은 핵 재앙의 공포를 몸으로 느낀다. 이 나라는 독립 당시 세계 4위의 핵 보유국이었으나 독립 후 스스로 핵을 포기하는 작업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지금은 핵무기를 하나도 보유하지 않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비핵화 작업은 국내의 핵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도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설득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제 최종 목표는 핵무기를 역사 속에 영원히 묻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핵의 안전을 위해 3대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첫째, 핵무기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고 둘째, 잠재적 핵 테러리즘을 예방하며 셋째, 핵 에너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이 군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강화하며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비준을 촉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수년에 걸쳐 자국 내에 있는 모든 핵물질에 대한 안전 대책을 마련했으며 핵에 관한 모든 국제 조약을 성실히 준수하고 있다. 

국가들이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핵 개발 욕망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나라가 핵을 보유하면 다른 나라도 자기네를 보호하기 위해 핵 개발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핵은 자연히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핵무기나 핵물질이 불법으로 거래되어 인류 전체의 안전을 위협한다.

우라늄 원광 최대 생산국의 핵 폐기 해법

1991년 1월1일 미·소 핵무기 제한 조약을 기념해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을 폐기해 만든 펜을 들고 있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북한과 이란의 핵은 초미의 세계적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모든 국가는 평화적 목적의 핵 에너지를 개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단,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마련한 안전 기준을 준수한다는 조건에서다. 그러나 북한과 이란이 이 의무를 준수할 가능성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카자흐스탄은 북한과 이란에 대해 자국의 선례를 따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으나 성과가 없다. 두 나라를 설득하는 길은 무력 사용이나 제재보다는 외교적 설득이 바람직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제 사회는 지난 10년간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카자흐스탄이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 중앙아시아를 핵무기 없는 비핵 지역으로 선포한 것이 그것이다. 이 선언이 나온 후 중앙아시아에서는 핵을 개발하려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선례를 본받아 중동이나 동아시아에도 비슷한 지역을 선포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물론 이란이나 북한이 동참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시도는 해볼 만하다. 단, 이런 구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가 비핵 지역 국가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 점에서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를 찾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다고 천명한 대목은 의미가 있다. 어느 나라를 핵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에는 반드시 법적 구속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구속력이 작동하도록 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카자흐스탄은 세계 최대의 우라늄 원광 생산국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 세계 최초의 핵 원료 은행을 설립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은행은 물론 IAEA의 감독을 받는다. 이 은행은 평화적 용도로 쓰이는 우라늄을 공급한다. IAEA의 규정을 준수하는 모든 나라는 이 은행을 이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공개 시장에서 우라늄을 구입해 이것을 고농축시켜 핵폭탄을 만드는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서울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앞서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 방법이 핵 확산과 핵 테러리즘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 노력에 동참하는 국가들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핵 원료의 평화적 공유가 실현되면 국가 간 유대는 강화되고 핵의 안전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카자흐스탄은 핵을 폐기한 후 대외 관계가 개선되고 국가 안보는 더 튼튼해졌다. 북한과 이란은 카자흐스탄의 사례를 선택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있다.

오바마는 DMZ 메시지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나쁜 행동’을 통해 보상을 얻는 낡은 악습을 버리지 않을 경우 ‘막다른 길(dead end)’로 갈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의 말은 매우 함축적이다. 북한의 생사가 걸려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란도 마찬가지다. 이란 핵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옵션”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것이 오바마의 메시지이다. 60여 년 전 일본에 나타난 꼬마나 뚱보는 이제 거대한 공룡으로 커졌다. 이 괴물의 위협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 인류의 숙제가 되었다. 그 점에서 카자흐스탄 모델은 강대국이나 불량 국가 모두가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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