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번호’에 얽힌 통신사들 장삿속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04.0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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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에 등급 매겨 수익 많이 발생시키는 ‘비싼’ 고객에게 주는 등 편법 영업…“전기통신사업법 위반” 지적

ⓒ 일러스트 김세중

KT, LG유플러스, SK텔레콤, SK브로드밴드, 온세통신 등 통신사들이 특정 전화번호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특정 전화번호란 0000이나 8282처럼 기억하기 쉬운, 뒤 네 자리 번호를 말한다. 국가의 자산인 전화번호를 영리 목적으로 거래하는 행위는 위법이다. 통신사들은 전화번호에 가격을 붙여 판매하지 않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실상 이익을 챙기고 있다.

요즘은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일이 전화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보면 개인에게 ‘기억하기에 좋은 번호’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기업이 이용하는 전국 대표 전화번호는 사정이 다르다. 전국 대표 전화번호란 1577-1255(식품의약품안전청)처럼 전국 어디에서나 지역번호 없이 여덟 자리 번호로 통화할 수 있는 번호이다. 번호는 한 개이지만 회선을 수백 개까지 늘릴 수 있어 기업의 콜센터, 보험사 등에 유용하다. 기업, 개인 사업자, 영업사원 등에게 전화번호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0000이나 1111처럼 한 숫자가 연이은 전화번호나 특정 업종을 떠올리게 하는 ‘연상 번호’는 웃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정도이다. 예를 들면 4024(포장 이사)는 이사센터, 4972(사고 처리)는 보험사, 2875(이빨 치료)는 치과, 1472(일사천리)는 택배사, 0832(공팍세리)는 골프연습장이 선호하는 번호이다. 한 대리운전업체는 국번과 뒷 번호가 같은,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로 인기를 끌어 업계 리더가 되기도 했다. 한 대리운전업체 관계자는 “우리 업체 전화번호를 20억원에 팔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전화번호 자체도 금값이지만 수많은 소비자 정보 등 부가가치가 붙은 전화번호는 단순한 8자리 번호가 아니다. 한 업체의 전화번호는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국번과 전화번호가 같은 경우 등이 A등급

각 통신사는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로부터 전화번호를 받는다.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통신사는 선착순이나 추첨과 같은 방법으로 공평하게 전화번호를 신청자나 기업에 배분하고 월 기본요금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특정 전화번호에 대한 수요와 경쟁이 심해졌다. 너도나도 가지고 싶어 하는 전화번호는 업계에서 이른바 ‘골드번호’로 통한다.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골드번호가 있지만, 먼저 신청하거나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그 배후에는 통신사들의 장삿속이 도사리고 있었다.

통신사는 특정 전화번호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 대신 통신사들은 편법을 동원한다. 방통위로부터 받은 ‘뭉텅이’ 전화번호 중에서 이른바 골드번호를 골라낸다. 그 골드번호에 등급도 매긴다. 각 통신사는 적게는 4단계에서 많게는 7단계로 등급을 부여해 골드번호를 관리한다. 이를테면, 0000, 1004, 2424, 8282와 같은 번호는 최고 등급인 A등급이다. 또 1599-1599처럼 국번과 동일한 전화번호도 A등급으로 분류한다.

전국 대표 전화번호는 번호 자체는 한 개이지만 전화 회선 수가 많다. 같은 번호로 여러 통의 전화를 동시에 받을 수 있어서 콜센터나 기업들이 선호한다. 통신사는 이 점을 이용한다. 개인 사업자가 먼저 특정 번호를 신청했다고 해서 A급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A등급에 속하는 전화번호는 최소 5백 회선 이상을 신청해야 받을 자격을 준다. SK브로드밴드 관계자는 “골드번호에 등급을 매겨 관리하는 것은 우량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수단이다. 1566-1000번과 같은 A급 골드번호는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함부로 팔지 않는다. 업체가 서류를 접수하면 통화량(회선 수) 등을 심사해서 판매 여부를 결정한다”라고 말했다.

통신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개 회선의 월 기본료는 2만원 정도이다. A급 골드번호로 5백 회선을 이용하면 1천만원, 6백 회선을 쓰면 1천2백만원의 기본요금을 매월 통신사에 내야 하는 셈이다. 한 퀵서비스업체 사장은 “우리는 많은 전화 회선이 필요 없어서 등급이 낮은 전화번호를 쓰는데도 매달 100만원을 기본료로 꼬박꼬박 통신사에 낸다. 거기에다 전화를 걸 때 통화료가 추가로 부가되므로 월 납부액은 총 1백50만원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최소 회선 수 정해 사실상 돈벌이 수단으로

골드번호에 최소 회선 수를 정해두어 사실상 통신사는 골드번호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KT 관계자는 “골드번호를 따로 떼어내어 등급을 매긴 사실을 약관에 표기했다. 이 자료를 방통위에도 제출했다. 모든 통신사가 그렇게 한다”라며 문제가 없다는 태도이다.

각 통신사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자체적으로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하부 조직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골드번호 거래업체이다. 예를 들어 0000이라는 골드번호를 여러 거래업체가 판매하도록 한 후, 가장 많은 회선 수를 가입시키는 업체에 그 번호를 준다. 이런 식으로 5대 통신사들이 지난해 벌어들인 돈이 2천5백30억원에 달한다. 한 골드번호 거래업체 대표는 “A업체는 5백 회선을, B업체는 6백 회선을 이용하려는 사용자를 물어온다고 하자. 통신사는 당연히 B업체에 골드번호를 넘겨준다. 통신사는 전화번호로 경매하는 식이다. 업체는 골드번호를 팔아 수익을 챙기고 통신사는 월 사용료를 이익으로 얻는 셈이다. 일부 거래업체는 통신사와의 친분 관계를 이용해 골드번호를 따오기도 한다. 그 골드번호를 1억원에 팔기도 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처음에 하부 조직의 존재를 부정하던 SK텔레콤 관계자는 “일부 거래업체가 경쟁적으로 영업하면서 발생하는 일이다. 통신사는 그런 영업 지침을 내린 바가 없다”라고 말했다.

통신사는 월 기본료 외에 통화요금도 별도로 챙긴다. 1588-XXXX 등과 같은 전국 대표 전화번호를 수신자 부담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는데, 080 번호를 제외한 번호는 소비자(발신자)가 시내 전화요금을 부담한다.

골드번호에 등급을 매기고 거래업체를 동원하는 등의 편법으로 전화번호를 거래하지만 세부 규정이 없어 방통위도 딱 부러진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통신사가 국가로부터 돈을 주고 산 전화번호도 아닌데, 영리를 목적으로 전화번호를 이용하는 행위는 전기통신사업법에 저촉된다. 관련법이 다소 포괄적이지만, 방통위는 골드번호에 등급을 매겨 관리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직접적인 거래가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그런 사례가 확인되면 조치하겠다”라고 말했다.

개인이 이용하는 휴대전화 번호의 골드번호도 영업대리점으로 배포해서 고객을 유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한때 SK텔레콤 대리점 점주였던 김 아무개씨는 “만일 뒤 네 자리가 7777인 골드번호가 있다면, 가장 비싼 요금제를 선택하거나 약정 기간을 가장 길게 하는 고객에게 그 번호를 준다. 통신사는 ‘비싼’ 고객을 추가하고, 대리점은 그만큼 수익을 챙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부 소비자들이 골드번호 마케팅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자, 통신사들은 이를 희석하기 위한 행사를 매년 벌여왔다. SK텔레콤은 2010년 2만4천여 개의 골드번호를 추첨을 통해 소비자에게 배포하는 행사를 열었다. KT와 LG유플러스도 지난해 각각 골드번호 15만개와 9천여 개를 추첨 형식으로 배포했다. 당시 통신사들은 3 대 1의 경쟁을 보였다는 등의 내용을 홍보하기도 했다.

특정 전화번호가 꼭 필요한 사람이 통신사로부터 그 번호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이 때문에 골드번호를 거래하는 사이트와 개인도 생겨났다. 골드번호는 수만 원에서 억원대까지 거래된다. 한 판매자는 뒷자리 네 번호가 0000인 휴대전화 번호를 3천만원에 판다고 인터넷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렸다. 그는 “좋은 전화번호를 확보한 후 프리미엄을 붙여 되파는 사람이 많다. 일종의 부업인 셈이다”라고 귀띔했다.

1980년대에 2424는 이삿짐센터가 눈독을 들이는 번호였다. 당시에 수백만 원의 웃돈이 오가는 행태가 심해지자 체신부는 공개 추첨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지난 2006년에는 방통위가 이른바 골드번호를 대리점 직원 명의로 보유하는 등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해온 통신사들을 적발했다. 지금도 골드번호는 또 다른 형태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 그 배후에는 통신사들의 투명하지 않은 영업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만큼 적절한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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