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스타’, 의문의 뒤편으로 지다
  • 소준섭│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12.04.23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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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중국 충칭 시 서기, 살인 사건 등 휘말려 결국 해임…권력 투쟁 결과라는 분석도 있어

실로 복잡다단한 보시라이 사건이다. 마치 소설과도 같은 이 사건은 급기야 영국인 살인 사건과의 연루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지난 3월15일까지만 해도 보시라이는 중국 서남부 대도시 충칭의 1인자로서 중국의 서부 지역을 평정했다는 의미의 ‘평서왕(平西王)’으로 칭해졌었고, 마오쩌뚱과 덩샤오핑 이후 중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정치적 스타였다. 올해로 62세인 그는 중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입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심각한 기강 문란 혐의와 다양하고도 선정적인 소문이 도는 와중에서 그의 정치적 운명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4월10일, 신화통신은 보시라이가 당 기율을 엄중하게 위반해 중앙정치국 위원 및 중앙위원 직무가 정지되었으며,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그를 입안 조사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신화통신은 “관계 기관의 소식에 따르면, 2011년 11월15일 충칭에서 사망한 영국인 네일 헤이우드 사망 사건에 대해 공안 기관이 재조사에 들어갔다. 조사에 따르면, 네일 헤이우드와 보시라이의 처 구카이라이(谷開來) 그리고 그 아들은 관계가 좋았으나 뒤에 경제 이익 문제로 갈등이 격화되었다. 재조사 결과 네일 헤이우드는 타살되었고, 구카이라이와 장샤오쥔(張曉軍: 보시라이 집의 집사)에게 커다란 혐의가 있었다. 구카이라이와 장샤오쥔은 이미 고의 살인죄로 사법기관에 이송되었다”라고 보도했다. 다만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가 ‘당 기율을 엄중하게 위반했다’고 밝혔을 뿐 아직까지 구체적인 죄목과 최종 처리 방식은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 최고 지도부의 권위에 도전?

지난 3월1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보시라이 당시 충칭 시 서기. ⓒ AP연합
그동안 보시라이 사건에 대해서는 중국 지도부 내부의 노선 투쟁이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살인 사건 연루에 이른 지금의 상황은 이미 노선 투쟁이나 권력 투쟁의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 지도부는 당내 어떤 파벌에 속했든, 또 무슨 노선을 지녔든, 이 사안이 중국 공산당의 중국 ‘영도’ 지위의 합법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일치된 인식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당 원로들은 보시라이가 당의 집단 지도 체제에 친숙해지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보시라이가 올가을 지도부 교체에 대한 고위층의 계획에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군부의 풍부한 인맥을 이용해 정변을 꾀하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돈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적극적인 자기 홍보나 마오쩌둥주의 부활로 상징되는 포퓰리즘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중앙 최고위층의 여러 권고와 충고도 귀담아듣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마오쩌뚱 시대의 홍가(紅歌)를 집단적으로 부르는 보시라이의 이른바 ‘창홍(唱紅)’ 운동은 이미 충칭을 넘어서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어린 초등학생부터 승려들까지 부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중국센터의 연구주임인 리청 박사는 “현재 중국은 다원화 사회로서 누가 무슨 노래를 부르든 그것을 금지시킬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보시라이가 추진했었던 대규모 형식에 있다. 이러한 군중 운동 규모의 방식은 그 자체로 이미 정치성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영국인 살해 혐의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구카이라이에 대해서는 사형을 포함한 엄벌이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인민일보는 보시라이에 관한 논평을 게재하면서 중국 건국 초 사형당한 인사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보시라이에게도 엄격한 처벌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이제 보시라이의 친척들에게로 불똥이 튀고 있다. 홍콩 신문인 애플데일리는 보시라이의 맏형인 보시융(薄熙永)에 관한 기사를 싣고 그가 과거 9년 동안 리쉐밍(李學明)이라는 가명으로 홍콩에 있는 차이나에버브라이트(中國光大) 증권회사에서 집행이사 및 부총경리직을 맡았다고 보도했다. 이 회사는 중국의 주요 은행 등 업무를 관할하는 대형 국영 회사이다.

애플데일리는 또한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의 두 언니도 홍콩의 회사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카이라이의 언니 구왕장(谷望江)은 1991년 홍콩에 시둬라이 그룹을 설립한 이래 홍콩의 여덟 개 기업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중국 대륙에도 20여 개의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언니 구왕닝(谷望寧)은 홍콩의 한 회사에서 공동 이사를 맡고 있다. 중국의 온라인 공간에는 보시라이와 그 가족에 대한 갖가지 소문이 떠돌면서, 이것이 보시라이의 이미지를 격하하려는 정부측의 의도와 관련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의 눈초리도 존재한다.

충칭 모델의 몰락이라고 보기에는 일러

중국의 경제 성장이 빈부의 격차를 더욱 넓히고 있다. 사진은 밥을 먹고 있는 빈곤 가정의 한 어린이. ⓒ EPA연합
한편 영국의 <비지니스위크>는 보시라이의 해임이 중국 정부가 공산주의 혹은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다만 보시라이와 같이 좀 더 강력한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있다고 전했다.

지난 3월 초 보시라이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중국의 지니 계수가, 대다수 사회학자가 사회 불안정을 이끄는 기준이라고 하는 0.46을 넘었다고 말했다. 왕리쥔 사건의 심각한 후폭풍에도 아직 건재하고 있었던 그는 “마오쩌둥은 국가 건설의 목표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 모든 사람으로 해금 일할 수 있는 일자리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함께 부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오직 소수들만이 부자가 된다면 그것은 곧 자본주의의 길로 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만일 새로운 자본주의 계층이 출현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소리 높여 주장했었다.

이 점과 관련해 중국 칭화 대학교의 패트릭 초바넥 교수는 보시라이가 해임되었지만 아직까지 충칭 모델의 기운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그는 “보시라이는 여전히 중국의 경제 및 사회에 존재한다. 특히 금융 위기 시기에 그것은 더욱 활발했다. 당시 시장 경제에 대한 회의가 증가하면서 정부 역할의 확대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소득 불평등에 대한 불만도 증폭되었다. 충칭을 만들었던 충칭 모델은 아직도 적지 않은 중국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모델이다”라고 지적한다.

보시라이는 실각되었다. 하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중국 사회의 부패와 분배의 불공정 문제가 올바른 해결 방향을 찾지 못한다면 제2의 보시라이는 언제든지 출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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