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므’ 입는 남성 패션, 시장도 쑥쑥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2.04.2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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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남성복 시장에 고가 브랜드 급증세…‘정장’ 벗어던진 직장 문화도 거들어

지난해 10월 오픈한 신세계 강남점 남성전문관. ⓒ 신세계 백화점 제공

외국계 컨설팅업체에 다니는 직장인 조근호씨(32·가명)는 평소 100만원짜리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 주말이 되면 30만원 상당의 니트와 1백47만원짜리 재킷을 걸치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날이 더워져 외투를 벗는 날이면 얇은 반팔 라운드 티셔츠만 입고 외출한다. 티셔츠의 가격은 10만원이다. 조씨는 “공장에서 찍어낸 옷이 아닌 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작품을 입고 싶어 고가의 남성 브랜드 옷을 구입한다”라고 전했다. 그의 1년 연봉은 5천만원가량이다. 이 중 10% 정도를 옷을 사는 데 투자한다. 조씨의 옷장에는 이미 1천만원 상당의 옷이 걸려 있다. 조씨는 미혼이다.

‘오렌지족의 전유물’ 편견 벗어난 지 오래

신원의 고급 남성복 브랜드 ‘반하트 옴므’. ⓒ 신원 제공
남자들이 입기 시작했다. 값비싼 옷을 사기 위해 자신의 월급을 아끼지 않는다. 단골 매장에서 신상품이 들어왔다는 문자를 받으면 서둘러 방문한다. 한발 늦어 원하는 상품을 놓치면 본사에 전화를 걸어 해당 제품의 재입고 여부를 묻는다. 쇼핑이 여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업계에서도 이같은 변화가 놀랍다는 반응이다. 한 남성복 업계 관계자는 “근래 들어 남성들의 옷에 대한 관심은 놀라운 수준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고가의 남성복 브랜드가 늘어났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라고 말했다.

남성들의 옷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은 ‘옴므(Homme)’ 브랜드의 선전이다. 옴므는 프랑스어로 ‘남성’을 뜻한다. 브랜드 이름에 옴므가 들어가면 남성만을 위한 브랜드를 의미하며 대부분 고가에 판매된다. 니트나 가디건의 가격이 50만원대까지 나가고 와이셔츠는 20만원대, 외투는 100만원 이상으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옴므 브랜드의 판매량이 느는 것은 그만큼 남자들이 옷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솔리드옴므는 국내 옴므 브랜드 가운데 맏형 격이다. 국내 남성복 시장이 채 갖춰지기 전인 1988년 출시된 후 국내 대표 옴므 브랜드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솔리드옴므를 입으려면 두 가지 진입 장벽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 장벽은 ‘사이즈’이다. 솔리드 옴므의 옷들은 슬림한 라인으로 출시되기 때문에 몸에 군살이 있거나 배가 나오면 입기 힘들다. 두 번째 진입 장벽은 ‘가격’이다. 니트 한 장 가격이 50만원 후반대까지 나가고 재킷이나 코트는 100만원을 넘어서기도 한다. 웬만큼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옷이 마음에 들어도 슬쩍 가격만 보고 매장을 나와야 한다. 이같이 진입 장벽이 높기 때문에 과거에는 특히 일부 극소수만의 전유물이었다. 솔리드옴므의 한 관계자는 “1990년대만 해도 우리 브랜드를 입는 사람들은 대부분 TV에 나오는 ‘오렌지족’들이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정이 바뀌었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닦은 일반 회사원들을 중심으로 찾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솔리드옴므 마케팅팀의 김지은 과장은 “4~5년 전만 해도 2백억원 수준에 머물렀던 매출이 최근 들어 3백50억~4백억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디자이너 브랜드인 ‘우영미 라인’을 제외한 매출이다. 해외 패션 관계자들도 한국 남성 패션업계의 성장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솔리드옴므는 5월 라이프스타일 쇼룸을 개장한다. 솔리드 옴므의 디자이너 라인인 ‘우영미’ 브랜드를 판매하는 플래그십 점포이다. 플래그십 점포는 주력 브랜드의 아이템들을 한자리에서 판매하는 곳으로 해당 브랜드의 이미지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브랜드 문화 공간이다. 단순히 옷을 파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총 5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곳에서 실제 옷이 있는 곳은 3, 4층뿐이다. 2층과 5층은 솔리드옴므 우영미의 스타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진다. 김지은 과장은 “순수하게 남성만을 위한 5층 규모의 플래그십 점포가 생긴다는 것은 최근 남성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라고 말했다.

유통업체들, 남성 전용관까지 갖출 정도

신원은 지난해 고급 남성복 브랜드인 ‘반하트옴므’를 론칭했다. 이전에도 남성 브랜드 ‘지이크’가 있었으나 남들과 다르게 입고자 하는 남성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했다. 반하트는 이탈리아의 유명 디렉터 알바자 리노와 협력하는 고급화 전략을 택했다. 기존 한국 남자들이 기피하던 과감한 컬러와 이태리 디자인 패턴을 적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신원의 한 관계자는 “브랜드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반응이 좋다. 현재 다섯 개 백화점에 들어가 있고, 향후 11개를 추가로 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유행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유통업계는 남성들의 이같은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신세계는 지난해 9월 강남점의 7층 전체를 남성들을 위한 층으로 개편했다. 이곳에는 고가의 유명 남성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다. 신세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백화점은 여성 의류가 메인이었으나 최근에는 매장을 남성들에 맞게 개편하는 추세이다. 강남점의 남성 전용관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가의 옴므 남성복 브랜드들은 최근 40~50대 중년층까지 찾는 추세이며, 매출도 상승세이다”라고 귀띔했다.

남자들이 이처럼 패션에 투자하게 된 데는 결혼 연령이 늦춰진 것이 한몫했다. 과거 남성들은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하면 서둘러 결혼을 했다. 경제력이 생김과 동시에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처하다 보니 자기 자신에게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결혼 연령이 올라가면서 자신의 수입을 자신에게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부모들 역시 과거와 달리 경제적 기반을 닦아놓은 경우가 늘어나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도 줄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고 투자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패션이다. 옴므 브랜드의 옷들을 즐겨 입는 약사 최승엽씨(30·가명)는 “결혼을 늦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경제적으로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고, 자연스레 관심 있는 패션 분야에도 과감하게 지출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남성들이 정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개성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경제력을 갖춘 남성들의 패션에는 정장이 주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세미 정장 또는 캐주얼 차림으로 일하는 직장이 늘어났다. 천편일률적인 패션에서 벗어나 자신이 입는 옷이 곧 자신을 표현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영남대 패션의류학과 이연순 교수는 “남자들의 의상이 입는 사람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옷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게 되는 풍조가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고급 남성 브랜드에 대한 선호가 늘어났다. 하지만 무조건 고가의 브랜드만 선호하기보다는 본인의 스타일에 맞고 때와 장소에 적합한 의상을 잘 고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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