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뛰는 그라운드, 축구가 마구 뒤집힌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2.05.2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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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리그에서 재벌들이 인수한 팀들의 ‘반란’ 잇따라…축구계, 커지는 ‘판돈’에 빈부 격차도 커져

지난 5월13일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한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이 영국 맨체스터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 시상식 직후 환호하고 있다. ⓒ EPA 연합

지난 5월14일 맨체스터 시내에서는 성대한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앞세운 버스와 그들을 향해 환호하는 팬, 흩날리는 종이 꽃가루. 프리미어리그가 시작된 뒤 지난 20년간 이미 12번의 우승 퍼레이드를 경험한 맨체스터 시에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잉글랜드 최고의 축구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연고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2011-2012시즌 우승 축제는 이전과 달랐다. 퍼레이드를 맞이하러 나온 10만여 명의 팬이 입은 유니폼은 맨유의 상징인 붉은색이 아닌 하늘색이었다. 맨체스터의 또 다른 클럽, 맨유에 밀린 영원한 2인자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의 팬들이었다.

맨시티는 프리미어리그 최종 라운드에서 극적인 역전승으로 퀸스파크레인저스를 제압해 승점에서 맨유와 같지만 골 득실에서 앞서며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지난 1967-1968시즌 프리미어리그의 전신인 퍼스트디비전에서 우승한 뒤 무려 44년 만의 리그 제패였다.

‘오일머니’로 무장한 맨시티, 44년 한 풀어

맨시티는 5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리그 중·하위권 팀이었다. 1960년대 말에 잉글랜드 무대와 유럽 축구계를 호령했지만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프리미어리그가 창설되었지만 한동안은 2부 리그에서 머물러야 했다. 지근거리 이웃인 맨유가 198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영입하며 근 20년간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해온 것과는 완벽히 대비되었다.

맨유의 그늘에 가려졌던 맨시티가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2007년이었다. 군부 쿠데타로 실각해 망명 중이던 전 태국 총리 탁신 치나왓이 맨시티를 전격적으로 인수한 것이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에서 물러난 스벤 고란 에릭손에게 지휘봉을 맡긴 탁신은 1천억원의 자금을 풀어 스타플레이어를 영입하며 맨유와의 경쟁을 선언했다.

1년 뒤 맨시티 주인이 UAE(아랍에미리트 연합) 아부다비 출신의 청년 재벌 셰이크 만수르로 바뀌었다. 태국 정부에 의해 자금줄이 막힌 탁신이 인수 1년 만에 자신이 투자한 인수 자금의 두 배를 받고 되판 것이다. 1년 사이 구단주가 뒤바뀌자 맨시티 팬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불안은 금세 황금빛 희망으로 변했다. 새로운 구단주는 이전에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동원했다. “부(wealth)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라고 호언장담한 만수르는 2008년 여름부터 매 이적 시장마다 1억 파운드(약 1천8백억원) 이상을 써대며 특급 선수들을 긁어모았다. 호비뉴, 뱅상 콤파니, 카를로스 테베스, 에마뉘엘 아데바요르, 야야 투레, 다비드 실바, 마리오 발로텔리, 세르히오 아구에로, 사미르 나스리. 이적 시장에 나오는 최고의 매물은 모두 맨시티의 차지였다.

“돈으로 우승 살 수 없다”라는 맨유 퍼커슨 감독의 말 무색케 해

맨시티 구단주 만수르. ⓒ EPA 연합
맨시티의 이같은 투자에 조바심이 난 것은 맨유였다. 맨유 역시 미국의 스포츠 재벌인 글레이저 가문에 인수되었지만, 그들이 쓸 수 있는 자금은 맨시티에 비하면 초라했다. 테베스마저 이적하자 뿔이 난 퍼거슨 감독은 “돈으로 선수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승과 역사는 살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졸부가 된 뒤 연일 대형 영입을 하는 시끄러운 이웃에 대한 폄하이자, 자신이 맨유에서 쌓은 지난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의 말은 결과적으로 틀렸다. 지난 시즌 FA컵을 차지하며 만수르가 인수한 뒤 첫 우승에 성공한 맨시티는 올 시즌 리그 우승까지 성공했다. 맨유는 홈인 올드트래포드에서 맨시티에게 2-6 대패를 당하는 참사를 경험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맨시티의 투자는 모두의 예상을 능가하는 성장세로 이어졌다. 맨유를 제치고 리그를 제패한 맨시티 선수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퍼거슨 감독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악동’ 발로텔리는 우승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가 챔피언이다. 퍼거슨 꺼져”라는 멘션을 남겼다. 테베스는 우승 퍼레이드 중 팬이 건넨 ‘R.I.P FERGIE(퍼거슨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피켓을 들어 맨유 팬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의 싸움은 시즌이 끝나도 계속되는 중이다.

맨시티가 4년 사이 프리미어리그의 판도를 바꾸기까지 쏟아부은 자금은 약 1조7천억원이다. 2000년대 초 첼시가 러시아의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에 의해 인수된 뒤 프리미어리그 빅4로 도약할 때도 놀라운 자금력을 보였지만 맨시티는 그것을 상회한다.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축구계의 판돈은 맨시티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 재벌 그리고 정치와 결탁한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신흥 재벌)가 속속 유럽의 축구클럽을 인수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올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는 이변이 발생했다. 만년 하위팀 말라가가 4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낸 것이다. 재정 위기로 부도 일보 직전에 있었던 말라가는 2010년 여름 카타르의 재벌 알타니가 인수한 뒤 뤼트 판 니스텔로이, 호아킨 산체스, 제레미 툴라랑 등이 영입되었고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의 양강 구도에 도전하는 팀으로 변모했다.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망(이하 PSG)도 카타르 자금에 인수되었다. 지난해 5월 카타르 국영기업인 카타르 투자청에 인수된 PSG는 명장 카를로 안첼로티를 영입한 것을 신호탄으로 올여름 대형 영입을 노리고 있다. 파투, 카카 등이 PSG의 영입 목표이다. 2022년 월드컵을 유치한 카타르는 축구에 대한 적극적 투자로 대회 홍보와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무명의 클럽 안지 마하치칼라가 주목받고 있다. 신흥 재벌 술레이만 케리모프가 자신의 고향 팀을 인수한 뒤 세계적인 스타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호베르투 카를로스, 사무엘 에투, 유리 지르코프 등이 거액 연봉에 끌려 러시아의 작은 도시 안지로 향했다. 지난 2월에는 터키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명문 축구 클럽이 되는 일반적인 길은 단계적 리빌딩에 의해 팀의 규모를 키워가는 것이었다. 어렵게 팀을 완성시켜 우승이나 챔피언스리그 출전의 성과를 내면 재정 확보가 가능했고, 그를 통해 뛰어난 감독과 선수를 영입하고 경기장을 증축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축구계에서는 이런 과정이 무시되고 거대한 자금 지원을 등에 업고 단숨에 레벨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산업적 측면에서 빅클럽의 증가는 반가운 일이지만 목적과 정체가 모호한 재정 투입은 사상누각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은 클럽 간의 빈부 격차만 키워 빅클럽만의 구도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투자 역시 선수 영입 비용에만 집중되고 있어 소모성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클럽 스스로가 경쟁력을 확보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먼 돈만 기다리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이 거대한 판돈들이 축구계에 독이 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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