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젊은 두뇌’ 뽑아놓고 손 놨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05.2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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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 4년 전 ‘한국의 미래 이끌 인재’ 15명 선정…이후 별도 연구 지원 등 하지 않아

지난 2008년 4월15일 한국학술진흥재단 대강당에서 BK21 사업 지원을 통해 우수한 연구 성과를 거둔 석·박사 과정생 15명을 ‘2008 BK21 영브레인’으로 선발하는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의 미래를 이끌 인재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정부가 인재를 선발해놓고 관리에는 소홀한 탓이다. 발굴한 인재를 육성하거나 활용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8년 20~30대 석·박사급 15명을 선정하고, 이들에게 ‘한국의 미래를 이끌 인재’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 사실을 국정 브리핑을 통해 국민에게 알렸다. 국민은 박수를 보냈고 희망에 부풀었다. 국가가 인재를 지원하고, 이들은 국가를 위한 연구에 전념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4년이 흐른 현재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반 박사들처럼 생존이라는 현실에 부닥쳐 있다.

정부가 젊은 인재를 선발한 것은 두뇌 한국(BK21) 사업의 일환이었다. 지난 1999년 시작한 BK21 사업은 21세기 한국을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국 70여 개 대학과 5백여 개 사업단(팀)이 참여했고, 국가는 지금까지 3조원 이상의 나랏돈을 투자했다.

어느 수준 이상의 연구 능력을 보이는 인력이 이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석·박사 과정 학생들은 고급 인력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08년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과 공동으로 그중에서도 연구 성과가 특출한 인재를 선발하기로 했다. BK21 사업에 참여한 학교와 사업단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모두 2백28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이 물망에 올랐다.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세계적인 학술지 등에 연구 성과가 실렸거나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 41명을 뽑았다. 영브레인 선정위원회는 면접 심사를 통해 15명을 확정했다. 분야별 19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특히 정보기술과 재료융합화공 분야의 경쟁률은 32 대 1을 넘어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서울대 등 여섯 개 대학의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전공 분야도 물리, 의학, 사회, 디자인, 외국어 등 다양했다. 25~32세의 젊은 나이이지만 연구 성과가 <사이언스(science)> <셀(cell)> 등 저명한 국제 저널에 실릴 정도로 실력을 갖춘 인재였다. 교과부는 이들을 영브레인(젊은 두뇌)이라고 호칭하며 상을 주었다. 다섯 명에게 교과부장관 표창을, 10명에게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표창을 수여했다. 각각 37.5g(10돈)짜리 순금메달도 주었다. 2008년 4월15일 한국학술진흥재단 대강당에 마련한 시상식장에는 수상자 15명을 포함해 가족, 지도교수, 사업단장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시상식에서 정부 관계자들은 수상자들에게 연구에 매진해 앞으로 노벨상 수상 등 세계 수준의 연구 업적을 거둘 인재로 성장해달라고 당부했다.

‘영브레인’들, 어디서 무엇이 되었나

서울의 한 종합 병원 연구실에서 한 연구원이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자료

인재로 인정받은 것 자체가 수상자들에게 큰 영광이고 명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차기 노벨상 후보’ ‘한국의 미래’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국민은 이들이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토양을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또, 추가로 인재를 선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추가적인 인재 선발은 없었고, 15명의 인재에 대한 관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과부 관계자는 “영브레인 선발은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낸 석·박사급들을 발굴해 연구 의욕을 고취하고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BK21 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연구비나 장학금을 주기 때문에 추가로 상금을 주거나 연구 지원은 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그들을 별도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졸업한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알아서 자리를 찾고 연구하는 것으로 안다”라고 대답했다.

교과부는 그들의 연락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15명은 현재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기자는 그들이 당시 몸담았던 학교와 BK21 사업단 등에 문의해서 15명 전원과 연락을 시도했다. 이 중 네 명은 행적을 확인할 수 없었고, 나머지 11명의 현황을 파악했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은 국내에 있고, 여섯 명은 외국에서 활동 중이다. 외국에 있는 이들은 미국과 일본 등지의 대학에서 박사후(post doctoral; 교수가 되기 위해 쌓는 연구 경력) 연구 과정을 밟고 있거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물리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심승보씨(32)는 나노기술 분야에서 연구했다. 그의 논문은 세계 3대 과학 저널 중의 하나인 <사이언스>에 실렸다. 졸업 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연구했고, 현재는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충남대 의대 박사 과정을 마친 양철수씨(30)는 사람에게 폐결핵을 유발하는 병원성 균에 감염된 세포 등에 대해 연구했다. 59건의 논문이 국내외 학술계에 발표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2009년부터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 과정을 밟았고, 올해 초 모교인 충남대 의대의 연구교수로 돌아왔다.

2008년 당시 문학박사 과정에 있던 이경수씨(여·30)는 TV 드라마를 수사학(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언어 기법)으로 분석해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한 이기석씨(34)는 진폭이 크고 고주파수를 갖는 강한 전파를 방사시키는 방법을 개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울산과학기술대학교 기계신소재공학부 조교수로 있다.

서울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한진주씨(여·31)는 암, 유전병, 바이러스성 질환의 치료에 응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성과를 냈다. 2009년부터 미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친 후 현지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에서 기계항공공학을 전공한 김필남씨(여·32)는 마이크로 및 나노 분야에 대한 연구자이다. 미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친 뒤 한국과학기술원을 거쳐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바이오마이크로시스템연구단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화여대에서 생물학 박사 과정을 마친 박지혜씨(여·32)는 암 발생을 억제하는 유전체 연구로 인정받았다. 현재 미국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이승곤씨(32)는 유체소자(공기나 액체로 밸브를 제어하는 행위) 관련 논문이 2006년 영국왕립화학회에서 발행하는 최고의 권위지에 실렸다. 현재 미국 대학에서 연구 중이다.

서울대 교육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이정아씨(여·36)는 학생들이 과학 수업에서 겪은 어려움을 분석했다. 그는 현재 국내에 있지만,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산업디자인 석사 과정을 마친 정은빛씨(여·31)는 2007년 세계 3대 디자인상인 레드닷 디자인 공모전(red dot design award)에서 최우수상(인테리어 액세서리 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삼성전자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다.
고려대 중문학 박사 과정을 나온 정지수씨(여·33)는 중국어와 한국어의 대조 분석 등에 대해 연구했다. 현재 고려대 중국학연구소에 연구교수로 있다. 송은영씨(여·29·당시 고려대 사회학 석사 과정), 이현우씨(29·당시 서울대 화학 통합 과정), 전준현씨(33·당시 서울대 생명공학 박사 수료), 홍진혁씨(32·당시 연세대 정보기술 박사 과정)의 현황은 파악되지 않았다.

이들에게 ‘영브레인 선정’은 어떤 의미였고, 연구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ㄱ씨는 “표창장과 금메달 외에는 어떤 지원이나 혜택을 받지 못했다. BK21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일회성 이벤트로 끝났다. 영브레인으로 뽑힌 내용은 개인 이력서에 한 줄 넣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자리를 잡을 때 도움이 되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정부가 상을 주며 격려는 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으로 연구 성과를 낸 업적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ㄴ씨는 “영브레인 선정을 해마다 이어갈 것처럼 하더니 정책이 바뀌었는지 그 후에 흐지부지 없어졌다”라며 아쉬워했다.

교과부는 당시 영브레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메달 제작, 표창장 인쇄, 심사비, 교통비, 식대 등의 행사 준비에 4천만원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ㄷ씨는 “상을 주고 홍보할 돈을 연구 지원에 쓰면 좋았겠다. 연구자가 돈타령만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데, 연구 지원이라는 것이 꼭 돈을 대주는 것만은 아니다. 연구자의 애로 사항을 파악하거나 학회 참여 기회를 넓혀주는 것도 연구 지원이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학위 과정을 마친 이후에 아무런 지원이 없었던 점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컸다. ㄹ씨는 “BK21 사업의 취지는 좋다. 외국 교류 연구 등은 젊은 학자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국가도 이 사업을 통해 인재를 발굴했다. 그런데 인재를 발굴만 하고 지원·육성하지는 못했다. 특히 영브레인이라고 선발한 15명은 석·박사 과정 이후에 어떤 지원이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수많은 박사 중 한 명의 신분으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서, 연구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가야 했다. 국가 연구소는 물론이고 사기업도 외국 박사 학위자를 선호한다. 대학이나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지원할 때 영브레인이라는 경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2008 BK21 영브레인’관련 문건. ⓒ 시사저널 박은숙


먹고사는 문제 힘들어 외국 나갈 생각하기도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에 일자리를 잡은 사람도 계약직이어서 불안한 신분이다. ㅁ씨는 “교수나 연구원으로 있는 사람도 계약직이 적지 않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각자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나도 다른 대학에 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다. 얼마 전에 면접을 보았고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외국으로 나갈 생각도 있다”라며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했다.

<시사저널>은 최근 ‘젊은 고급 두뇌들, 줄줄이 한국 떠난다’라는 기사(제1178호)를 통해 외국으로 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는 고급 인력의 현실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ㅂ씨는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연구하기도 쉽지 않다. 사소한 것이라도 배려해주면 연구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ㅅ씨는 “영브레인으로 선정되었다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면 불평등하다. 영브레인에 선정된 것은 개인적인 영예이다. 그 후에는 다른 박사들처럼 무한 경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이 취재에 들어가자 교과부는 영브레인 등 인재들의 자료를 모으고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알려왔다. 또 지난해부터 박사 과정 학생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 2만명 중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을 제외한 전일제 학생은 8천명이다. 여기에서 3백명을 선발해 연간 3천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유정기 BK21지원실장은 “올해는 2백명을 추가로 뽑는 등 5년 동안 모두 9백~1천명의 박사 과정 학생들을 지원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연구 지원이 늘어난 점은 반길 일이다. 그러나 역시 박사 과정 이후에는 스스로 생존해야 한다. 국가가 인재를 잘 발굴하고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염려는 여전하다. 


BK21 사업, ‘선택과 집중’해서 올해 마무리

BK21 사업은 1단계(1999~2005년)와 2단계(2006~12년)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2단계 시작 연도인 2006년 74개 대학, 5백69개 사업단을 지원했다. 매년 평가하면서 우수 사업단에는 사업비를 증액했고, 그렇지 못한 사업단의 예산은 삭감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현재 이 사업에 참여한 대학은 65개, 사업단은 5백개로 줄었다. 이 기간에 매년 2만명의 대학원생과 2천5백명의 연구 인력, 7천명의 교수가 참여했다.

BK21 사업은 올해 마무리된다. 교과부는 현재 이 사업에 대한 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이의신청 고려와 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9월께 평가를 마칠 예정이다. 비슷한 시기에 종료될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사업과 통합해 새로운 인재 육성 사업 계획안을 올 상반기까지 마련한다는 것이 교과부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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