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 운동가인가, 막후 실세인가
  • 이승욱 기자 (smkgun74@sisapress.com)
  • 승인 2012.05.21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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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이석기 당선인에 평가 크게 엇갈려…“이정희 같은 이 대통령 만드는 게 꿈” 발언도

4월12일 열린 제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당선증 교부식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인이 소감을 말하고 있다. ⓒ 뉴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 논란이 가열될수록 부각되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당선인(50)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19대 국회 개원을 앞둔 지금, 이당선인의 행보가 정치권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석기. 놀랍게도 그의 이름 석자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4·11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을 통해 주목받기 이전에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진보 운동 진영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 출신 인사 중에서도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이석기가 도대체 누구이기에…’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비당권파 일각에서는 이당선인이 통합진보당 구(舊)당권파의 핵심 그룹인 세칭 ‘경기동부연합’의 ‘숨은 실세’라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당선인과 구당권파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당선인과 구당권파(경기동부연합)는 단순히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끈끈한 동지적 신뢰 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 논란의 해법으로 꼽히는 이당선인의 사퇴를 구당권파 쪽에서 결사적으로 막으려 드는 분위기도 여기서부터 나온다.

민혁당 사건 탓에 누나 잃는 아픔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82학번인 이석기 당선인의 학생운동 경력은 지금까지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80년대 후반 학번의 운동권 출신으로 통합진보당의 민주노동당계 중앙위원(비당권파)인 ㄱ씨는 “이당선인이 비례대표에 출마하면서 이름을 들은 것이 전부이다.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이당선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당선인의 과거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탓에 비당권파나 일부 언론에서는 이당선인을 ‘베일에 싸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대 초반이었다.

이른바 자주파로 불리는 NL(민족해방계열)의 교본으로 통하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씨가 지하당 조직을 재편한 1999년의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에서 당시 공안 당국은 이당선인을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지목했다. 이당선인은 최근까지도 “(민혁당이 운영될) 당시 수배 중이라 (민혁당에) 가담해 활동한 적이 없다”라며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민혁당 사건에 연루된 후 그의 ‘헌신적인 운동가’ 이미지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당선인은 민혁당 사건으로 수년간 수배자 생활을 하다, 지난 2002년 5월 체포된 후 이듬해인 200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1년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감옥에 간 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와 양심수후원회 등을 중심으로 ‘이석기 석방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대대적인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의 모친이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2003년 6월 7일간의 특별 휴가를 받아 어머니와 재회한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이당선인의 누나 고 이경선씨는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에서 부이사관(3급)으로 일하다, 이당선인의 수배 생활을 도왔다는 이유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에서 조사를 받고 정직 2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이후 정직 처분이 부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지만, 기무사의 조사를 받고 법정 싸움을 벌이며 얻은 ‘다발성 경화증’으로 지난 2005년 6월 숨졌다. 민혁당 사건이 이당선인에게 준 아픈 가족사의 한 대목이다.

당권파 “이당선인은 지켜줘야 한다 인식 커”  

민혁당 사건으로 수감 중이다 2003년 8·15 특사로 가석방된 이석기씨가 동료와 민가협 어머니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이석기 당선인은 사면된 후 본격적인 진보 정당의 선거 전략가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CNP전략그룹과 사회동향연구소 등을 설립하고, 진보 매체인 ‘민중의 소리’ 이사를 지내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 특히 일각에서 ‘경기동부연합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CNP전략그룹은 이당선인이 지난 2005년 2월 학생회와 통일단체 등이 주최하는 행사를 기획하는 업체로 설립했다. CNP전략그룹은 2006년 민주노동당 지방선거 광고 제작과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의 선거 기획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선거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고, 지난 2010년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이른바 ‘진보 교육감’ 선거 기획 등을 도맡기도 했다. 비당권파 쪽에서는 이당선인의 CNP전략그룹이 진보 진영의 사업 수행을 도맡은 데 대해 여러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당선인의 한국외대 8년 후배(90학번)로 현재 그에 이어 CNP전략그룹 대표를 맡고 있는 금영재 대표는 “(이당선인이)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고초를 겪고 나온 상황에서 (경기동부연합 등) 정파 조직의 활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합법적인 기업 활동을 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아온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진보 진영 사업은 미수금이 많은 사업으로 미수금이 회당 억대가 넘기도 한다. (이당선인과 CNP전략그룹은) 기업으로서 생존을 하려고 했는데, 자금줄이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이다”라고 일축했다.

논란을 넘어 이당선인을 대하는 구당권파의 자세는 단순한 정치적 이해관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당선인이 지난 3월 개설한 페이스북의 담벼락에 한 여성 당원으로 보이는 이가 올린 글을 보면, ‘이렇게 (이석기) 대표님과 친구 먹어도 되는지…(중략)…진보 정당 운동의 전략을 세우고 진보 집권의 전망을 밝히신 전략가이자 동지 사랑을 실천하는 가슴 뜨거운 혁명가’라고 쓰고 있다. 민주노동당 학생위원으로 활동한 통합진보당 당권파 계열의 중앙위원(현 기초의회 의원) ㄴ씨는 “단순히 (당권파와 비당권파를 구분하는) 진영 논리를 떠나 이당선인과는 (운동권으로 가지는) 정서적인 동질성이 있어 지켜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당선인은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에 대해 “경선에서 당원들의 압도적인 다수표를 받았다”라며 거부하고 있다. 대중적 인지도가 거의 없었던 그가 당원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한 이후 최근까지 거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래서 존재감마저 미미했던 이석기 당선인의 행적에는 여러 의문이 남는다. 정치권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가오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당선인이 킹메이커로서 역할을 키우거나 당권파 중심의 야권 연대를 더욱 가속화하려 한 것 아니냐”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당선인은 지난 5월11일 방송된 tvN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당선 가능성을 가장 높게 점치면서도 “이정희 (전 공동) 대표와 같은 분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말 꿈이 현실화되는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당선인은 2012년을 위해 지난 10년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기다려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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