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우울증’에 빠진 미국 대졸자들
  • 한면택│워싱턴 통신원 ()
  • 승인 2012.05.2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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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 장기화로 절반이 제때 일자리 못 구해…학자금 대출도 1조 달러 돌파해 대학가 시위 일상화

지난 2월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생들이 취업 문제를 해결해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AP 연합

미국 대학의 졸업 시즌이다. 그러나 많은 대학생은 기쁨 대신 집단우울증을 앓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학 진학률이 급등하면서 10명 중 6명 가까이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대공황 이래 최악이라는 대침체를 거치면서 미국 대졸자들은 엄청난 학자금 융자 빚더미에 짓눌린 채 대학 문을 나서고 있다. 절반은 일자리를 제때에 찾지 못해 경제 우울증에 빠지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부모 집에 얹혀사는 백수들이 늘어나고 있고, 심지어는 한 달에 수백 달러씩 내야 하는 학자금 융자를 갚지 못해 실제 우울증 환자가 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최근 플로리다에 있는 한 대학을 졸업한 캐이틀린 씨는 졸업식장에서 사각모에 ‘일자리가 필요해요!! 나를 고용해주세요’라는 글귀를 써 넣은 채 시선을 끌려고 애썼다. 시선 끌기가 아니라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고 싶은 구호를 글로써 외친 것이다. 올봄에 4년제 미국 대학의 문을 나선 젊은이들만 해도 1백50만명에 달한다.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캐이틀린 씨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파트타임이나 인턴으로 일하는 사례도 급증

미국 경제가 2007년 12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최악의 침체를 겪고 이제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청년 실업 문제는 아직도 심각하다. 그 때문에 미국 대학들의 졸업식장은 경제 우울증에 걸린 20대 중반 대졸자들로 가득해 침울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올해 미국 대학 졸업생들 가운데 절반이 앞으로 1년 안에는 취업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예상이 나오고 있다. 25세 안팎의 나이로 4년제 대학 문을 나선 미국의 대졸자 가운데 졸업하자마자 일자리를 찾은 사람들은 24.4%로 네 명당 한 명에 불과하다.

1년 안에 취업하는 대졸자들도 50%에 못 미치기 때문에 미국의 대졸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적어도 1년은 백수로 지낸다는 결론이 나온다. 불경기 직전인 2008년 대졸자들은 73%가 1년 내에 일자리를 찾았던 것으로 나타나 얼마나 구직이 어려워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대학 학부 졸업자들 가운데 15~20%는 대학원에 진학하고 있는데,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대학원 진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대학원을 선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대학을 졸업한 데이비드 씨는 풀타임 직장을 구하지 못해 걱정했으나 지금은 새로운 꿈을 안고 시애틀로 향했다. 항공공학을 전공한 덕분에 보잉 사로부터 인턴직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적은, 거의 무급에 가까운 임금만 받고 일하게 되었지만 최대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 사의 인턴직을 따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느끼고 있다. 새라 씨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실업 우울증을 느낄 틈도 없이 일터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세 곳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한 곳과 파네라 빵집 그리고 세븐일레븐 등 세 군데에서 간단한 일을 하고 있다.

데이비드나 새라와 같은 미국의 대학 졸업생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바쁘게 일하고 있고 실업자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대다수는 대졸자가 하지 않아도 되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4년제 대졸자들의 통상 실업률은 7~8%에 불과하지만, 실질 실업률은 15%를 넘어서고 있다. 따라서 대졸 청년들이 백수로 오래 견딜 수 없어 우선 파트타임이나 인턴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숫자상으로만 실업률이 낮아졌을 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청년 실업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풀타임 직장을 잡아도 미국의 대졸자들은 또 한 번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물가는 올랐는데 급여는 오히려 예전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현재 대졸자들의 초봉은 평균 2만7천 달러로 지난해 3만 달러에서 3천 달러가 줄어들었다고 공영 라디오인 NPR방송은 전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PI)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대졸자의 시간당 임금은 10년 전에 비해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미국 남성 대졸자의 시간당 초임은 평균 21.68달러로 10년 전에 비해 11% 낮아진 것이다. 여성 대졸자의 경우에는 2001년보다 7.6% 떨어진 18.80달러였다. 이 때문에 최근 5년 동안 대학을 졸업한 미국 대졸자들은 1990년대 졸업자들에 비해 상당히 낮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은 안 되고 봉급은 줄어들었는데도 미국 대졸자들은 엄청난 학자금 융자 빚더미에 짓눌린 채 대학 문을 나서고 있다. 학생 1인당 평균 2만5천 달러의 빚을 지고 대학을 졸업하고 있다. 그러나 평균이 그렇고, 상당수 대졸자의 학자금 융자 빚은 그보다 훨씬 많아 적어도 5만 달러는 되는 것으로 보인다. 주립대학을 졸업한 캐시 씨는 무상 원조를 제외하고도 5만 달러에 가까운 융자 빚을 졌다. 대학을 졸업한 지 6개월 또는 9개월 후부터는 한 달에 최소한 3백50달러씩, 적어도 20년 동안 갚아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학비가 비싼 대학을 졸업한 글로리아 씨는 10만 달러나 되는 학자금 융자 빚을 지고 있어 한 달에 7백 달러씩을 갚아야 되는 탓에 걱정이 태산이다.

미국의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에게 융자해주는 학자금은 1조 달러를 돌파해 신용카드 빚보다 더 많아졌다. 부모들의 연 소득이 3만 달러도 안 되는 저소득층 자녀일 경우 거의 돈을 내지 않고도 대학을 다닐 수 있고, 백만장자 자녀들은 학비 걱정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민 가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연 소득 4만~5만 달러의 중산층으로,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대학생들은 수만 달러의 학자금 융자 빚을 지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학자금 융자액은 개인 파산하더라도 갚아야

미국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오바마 대통령. ⓒ UPI
미국 대학생들에게 대출해준 학자금 부채가 1조 달러를 돌파하자 대학생들이 길거리로 몰려나와 항의 시위를 벌이는 사태로까지 비화되었다. 대학생들은 곳곳에서 ‘빚 없는 학위’ 등의 구호가 적힌 표지판을 들고 학자금 대출 서류를 태우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대학생은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라고 외쳤다. 한 치과대학생은 8년 간의 학부 생활과 치과대학 진학으로 18만6천 달러의 빚을 떠안게 되었다고 하소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나와 미셀도 8년 전에야 학자금 융자금을 가까스로 갚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수많은 미국 대졸자는 이제 경제 우울증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우울증 환자가 될 지경에 빠져들고 있다고 적색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많은 대졸자가 갚아야 할 학자금 융자 빚은 늘어났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해 돈도 못 벌고 심지어 융자금을 갚지 못해서 디폴트시키는 이중·삼중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집세를 낼 돈이 없는 탓에 부모 집에 얹혀사는 청년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금 융자 디폴트 비율은 불경기 직전인 2007년 6.7%에서 2009년에는 8.8%로 올라갔다.

학자금 융자액은 미국에서 개인 파산을 하더라도 탕감받지 못하고 반드시 갚도록 되어 있다. 지금 상당수 미국 대졸자는 경제 우울증에서 진짜 우울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에 내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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