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심장부에 파고든 ‘공안’ 칼날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2.05.29 00: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검찰, 통합진보당 당원 명부 압수해 정치적 파장 예고…‘비밀 당원’으로 불리는 일부 교사·공무원 불이익 생길 수도

지난 5월22일 검찰이 통합진보당 압수수색을 실시한 데 항의하는 당원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유장훈

지난 5월22일, 통합진보당의 당원 명부가 검찰에 압수되었다. 통합진보당은 “정당 정치 활동의 기본권을 짓밟은 헌정 사상 유례없는 검찰의 폭거이다. 정당의 당원 명부를 탈취한 것은 명백한 정치 사찰이다”라고 규탄했다. 반면 보수 진영은 “통진당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풀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되었다”라며 반색하고 있다. 특히 검찰이 압수수색의 근거가 된 비례대표 부정 경선 외에도 야권 단일화 관련 여론 조작 의혹, 지도부의 금품 수수 의혹,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 등에 대해서도 수사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치적 파장이 예고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파악해 ‘용공’으로 몰 수도

당원 명부에는 당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소속단체·직장 등 기본적인 개인정보는 물론 당비 납부 내역, 계좌번호와 같은 금융 정보까지 포함되어 있다. 당원 개개인의 당내 활동 내역 등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현재 통합진보당 당원은 13만명 정도이지만, 전신인 민주노동당까지 포함하면 20만명 이상의 정보가 당원 명부에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원 명부만 있으면 통합진보당의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강기갑 통합진보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 당원 명부를 두고 “당의 심장이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당원 명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강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정미 혁신비대위 대변인은 “비례대표 경선 부정을 수사하겠다는 것이 검찰의 명분인데, 그렇다면 선거인 명부를 가져가면 되지 당원 명부를 가져갈 필요가 없다. (명부를 통해) 진보 세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정치 사찰을 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내부의 자정 능력을 봉쇄하고 진보 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는 검찰의 검은 속내를 보여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검찰 공안부가 이번 사건을 맡은 것 자체부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공안 정국을 조성하려는 검찰의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는 “사정 당국은 진보 정당을 아직까지도 공안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 이번에 확보한 통진당 당원 명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감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검찰이 필요할 때마다 이 블랙리스트를 언론에 슬쩍슬쩍 흘리면서 공안 정국을 조성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체들에게도 (블랙리스트를) 제공해 구직 자체를 막을 수도 있다. 진보 진영의 씨를 말리려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공안 사건을 조작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박은지 진보신당 창립준비위원회 대변인은 “당원 명부를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용공 사건을 조작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검찰이 당원 명부를 압수한 것은 이를 위한 포석이다”라고 강조했다.

통합진보당과 야권 연대를 이룬 민주당에서도 ‘정치 검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용진 대변인은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정당 내에 계파가 존재한다. 이에 따른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검찰이 개입하겠다는 것인가? 마치 이승만 정권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압수한 당원 명부를 영장 발부 목적 이외의 용도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검찰의 모습을 보면 야권 연대의 한 축인 통진당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당원 명부를) 활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야권 연대를 붕괴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검찰의 첫 타깃은 이른바 ‘비밀 당원’이라고 불리는 교사·공무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지방공무원법 및 정당법에 따라 교사와 공무원은 정당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국공무원노동조합 출신들이 통합진보당에 당적을 두고 있다는 의혹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만약 이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무더기 파면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0년 민노당 시절 이와 같은 문제가 불거져 2백73명의 교사·공무원이 기소되기도 했었다. 이와 관련해 통합진보당측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대변인은 “현재 교사·공무원 당원은 없다. 당연히 (이들로부터) 당비나 후원금을 받은 것도 없다. 준당원 성격의 당우 제도도 지난 2007년에 이미 폐지되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노당 시절을 겪은 진보신당 관계자는 “2010년 당시 대다수의 교사·공무원이 탈당했지만 현재도 (통진당에)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분명히 이 문제가 터질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교사와 공무원의 정당 활동을 금지하는 현행법을 뜯어고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이 당원 명부에 있는 금융 정보를 통해 돈거래 부분을 파고들 경우 통합진보당이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당권파가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인의 정치광고기획사 CN커뮤니케이션즈에 12억원 이상의 일감을 몰아주었고, 이 돈이 당권파의 자금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다. 진보 진영은 이에 대해서도 ‘아전인수’ 격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김종철 부대표는 “검찰은 계좌 추적 등을 통해 자금이 서로 오고 간 당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려되는 점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마구잡이로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까지 (언론에) 흘려 결국 진보 진영 전체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혁신비대위의 쇄신 노력도 주춤하게 만들어

검찰의 개입으로 통합진보당 내홍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전만 해도 문제가 된 당권파 비례대표 당선인의 사퇴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와 관련해 국회 차원에서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제명 움직임이 일기도 했었다. 그런데 검찰의 정치 탄압 쪽으로 이슈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면서 ‘야당 대 검찰’이라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과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는 모습이다.

혁신비대위의 쇄신 노력도 주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권파인 김미희 당원비대위 대변인은 “검찰에 압수수색 빌미를 제공한 것은 혁신비대위측이다. 검찰의 공안 탄압으로 당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내부 갈등을 격화시키는 조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휴전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혁신비대위측 관계자는 “외부의 적에게 공격을 받는 와중에 내부의 사람에게 계속해서 압력을 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19대 국회 개원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라고 토로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