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던 시절, 살아 있던 아이들 눈빛을 담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06.1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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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최민식, 롯데갤러리에서 사진전 <소년시대> 열어…1960~70년대 추억 속 한 장면 같은 작품들 돋보여

ⓒ 시사저널 전영기
사진작가 최민식(84)의 작품을 확인하거나 프린팅하려면 대전의 국가기록원으로 가야 한다. 지난 2008년 최작가가 자신이 찍은 필름 원판 10만여 장을 포함한 작품 13만여 점의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기증했고, 국가기록원에서 이를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록물이 영구 보존되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보도 저널리즘에서 활약한 적이 없는데, 그의 사진 작품은 왜 국가기록원으로 간 것일까. 이것은 그의 카메라 앵글이 지독한 가난의 시대를 포토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담아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부산 인근에서 간난신고의 삶을 살던 남녀노소의 일상 중 그의 카메라 셔터를 통과했던 몇몇 파편들은 필름에 당시의 삶을 화석처럼 남겨놓았다.

지독한 가난 경험했던 것이 ‘밑천’

그는 평생 가난만 쳐다보고 있다. 요즘은 가난한 제3세계로 촬영 여행을 가기도 한다. 왜 가난한 사람에게만 집착하는 것일까. “가난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불쌍한 것을 돕고 싶은 마음,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강의 중에도 가난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은 짐 싸서 나가라고 한다. 가난과 추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찍는 순간에 그런 것을 느낀다. 느낌은 체험에서 온다.”

경남왜관 1984 소년, 표정을 짓다. ⓒ 2012 by Chio Min Shik
그는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다. “내가 의주 사람인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5년 동안 소작을 지었다. 1년 농사를 지어 소작을 내고 나면 7개월만 먹고살 수 있었다. 아주 어려웠다. 그러다 전쟁이 나면서 서울로 혼자 내려왔다.” 그때의 강렬하고 냉혹했던 가난의 경험이 그를 평생 빈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던 듯싶다. “낮에 발견했는데 며칠 굶었던 것 같았다. 밥을 못 먹으니까, 애들이 기운이 없으니까…. 내가 있는 대로 몇 푼씩 돈을 줄 때도 있고, 풀빵을 사주기도 하고….” 그렇게 그는 부산 거리에서 마주친 빈자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사진작가의 길은 역설적으로 그를 더 어렵게 했다.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는 그의 사진을 좋아했지만, 한국 정부는 그를 탐탁찮게 여겼다. 3공 시절, 그는 못사는 사람만 찍는다고 해서 용공 혐의자로 몰릴 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진 작업은 그와 가족의 삶을 떠받들기에는 경제적으로 무력했다. 부인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요즘은 가만 있지만 반대, 반대,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 처음 보았다. 딴 것 없다. 생활이 안 되니까. 나라에서 훈장도 주었지만 상 받으러 가도 집사람은 참석을 안 한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려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와 생활의 어려움으로 결국 뜻을 접었다.

가난에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의 현장 포착…화려하고 따뜻한 느낌 줘

부산 1978 소년, 순간에머물다. ⓒ 2012 by Chio Min Shik
지독한 가난을 담은 그의 사진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가난에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의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가난’이라는 상황 자체를 무색케 할 정도로 빛난다. 서울 롯데갤러리본점에서는 최작가의 1960~70년대 작품 중 아이가 등장하는 작품 1백65점을 골라 <소년시대>라는 이름으로 그의 사진전을 열고 있다.

1965년의 비 오는 부산 거리에서 비닐 우산을 팔고 있는 열 살 남짓한 소년은 장사꾼의 그것 같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흉내 내고 있고, 1967년의 빡빡머리 남해 소년은 최소한 다섯 군데 이상을 기운 헤진 바지에 까맣게 변한 고무신을 신고 갑자기 들이닥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고, 1969년의 부산 소년은 이른 해수욕에 나섰다가 영도다리 밑 바위 위에 친구들과 따개비처럼 오글오글 모여 앉아 있다. 그해 두세 살 먹은 동생을 포대기에 업은 열 살 정도 될 법한 계집아이는 학교 대신 어시장으로 동생을 업고 갔다. 일하다 온 엄마는 딸애의 포대기를 끄르지도 않고 잠시 선채로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부산 1969. ⓒ 2012 by Chio Min Shik
왜 아이들이 그때는 학교에 가지 않고 거리를 서성이며 애를 업고 다니는지, 아이들 입성은 왜 그 모양이었는지는 경제학이나 사회학, 보건학, 복식사에서 사진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추정해 근사치의 답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아이들의 입성이 남루하고 때투성이 손발을 갖고 있어도 눈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혹독한 환경에도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최작가의 전시회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따뜻한 느낌의 전시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이로 내가 85세이다. 이 나이에 눈도 밝고 귀도 밝고 걸음도 빠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진 찍으라고 혜택을 준 것이다. 감사히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할 것이다. 작품집 <휴먼> 시리즈가 내년에 15집이 나온다. 내 생각에는 18집까지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부산 1987 소년, 친구를찾다. ⓒ 2012 by Chio Min Sh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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