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 깊었던 독서광, 컴퓨터에서 새 길 찾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2.06.25 01: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철수의 ‘인생 행로’ / 의대 교수에서 백신 개발자로 변신 |‘청년 멘토’로 각광받으며 선거 때마다 정당 영입 제의받아

1995년 2월17일 안철수 컴퓨터바이러스 연구소 설립 기자회견 때의 모습(위 ⓒ 뉴스뱅크이미지). 오른쪽은 안철수연구소 대표이사 시절의 모습(ⓒ 뉴스뱅크이미지).
의사, 프로그래머, 벤처기업가, 경영학과 교수, 공학대학원장, 시민단체 이사 등등. ‘청년 멘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이력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는 1962년 2월26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안철수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산 동성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60명 중 30등 안팎을 오가는 등 그다지 신통치도 않았다. 이 성적은 부산 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특정 과목, 예체능 분야에서 도드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학교 도서관의 사서까지 오해하게 만든 그의 엄청난 독서량이 그것이다. 매일 몇 권의 책을 읽어 결국 초등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책벌레였다. 사서는 매일 몇 권을 반납하고, 다시 몇 권을 빌려가는 안원장이 대출 카드에 이름을 적는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 대출을 거부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고3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 이내 1등에 올랐고, 졸업과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1990년 만 27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이 되었다.

안원장이 컴퓨터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백신 개발자로 7년간의 ‘이중 생활’을 해오던 그는 의대 교수로서의 책임감에 고민하다 결국 가운을 벗고 백신 개발자의 길을 선택했다. 창업 후 4년간 적자에 허덕이던 안철수연구소는 1999년 4월26일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였던 ‘CIH바이러스(체르노빌바이러스) 사건’ 이후 흑자 전환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컴퓨터 백신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매출이 급증해 1999년 이찬진씨의 ‘한글과컴퓨터’에 이어 국내 소프트웨어업체 사상 두 번째로 연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관련 업계 최초로 순익 100억원 돌파를 달성했다.

<무릎 팍 도사> 출연 후 대중 지지도 급상승

2005년 잘나가던 안철수연구소 CEO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영자 수업을 받은 그는, 2008년 4월 KAIST 경영학과 교수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젊은이들의 ‘청년 멘토’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2009년 6월에 출연한 MBC <황금어장-무릎 팍 도사>로 대중적 인기도 높아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정보통신부장관 등으로 끊임없이 입각 제의를 받았던 안원장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으로부터,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이후 재·보선 등 선거 때마다 여야에서 동시에 영입설이 돌았으나 “(정치를) 잘할 자신이 없고 힘(권력)을 즐기지 못한다”라며 피해왔다. 그러나 결국 지난해 9월 서울시장 재·보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것을 계기로 대권 주자로 급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안원장은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에는 음주를 꽤 즐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음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급성간염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특히 두 번째 입원했을 때는 3개월간 병실에 있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음주와 흡연을 하지 않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