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심 공약’ 부메랑에 휘청이는 일본 민주당
  • 도쿄·임수택│편집위원 ()
  • 승인 2012.07.10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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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운영에 불만 쌓던 ‘오자와 파’, 대거 탈당해 신당 창당 돌입

지난 6월26일 일본 도쿄 거리에서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소비세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EPA 연합
일본 정치에서 드디어 예측 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오자와 전 민주당 대표의 탈당이다. 탈당 명분은 소비세 인상 반대이다. 그동안 오자와는 당내 운영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이런 날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계보 의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다. 중의원 38명, 참의원 11명이 동반 탈당했다. 주로 초선이거나 지역적 기반이 약한 의원들이다. 대부분 오자와가 간사장 시절 음양으로 지원을 받은 의원들이다. 이들은 바로 신당 창당에 돌입했다.

중의원 탈당 의원 37명은 ‘국민 생활이 제일- 무소속의 발걸음’을, 참의원 12명은 ‘국민 생활이 제일’이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국민 생활 제일’을 강조하는 이유는 민주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3년 전 중의원 선거에서 ‘국민 생활이 제일’이라는 슬로건으로 대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보폭을 사민당까지 넓히고 있다. 선거의 백전노장인 오자와는 본능적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중의원 선거가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자신이 신당의 대표이자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탈당, 창당, 합당을 반복해온 그가 선거철을 맞이해 모처럼 의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자와는 탈당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들은 신당 설립을 앞두고 정권 교체의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드는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정치 자금 수수 문제로 내몰렸던 궁지에서 빠져나왔다는 회심의 미소로도 보였다. 하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아주 차갑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70% 이상이 오자와 신당에 대해 부정적이다. 오자와는 자민당에서 정치를 시작해 자민당의 다케시타 파가 분열할 때 탈당했다. 그 이후 신생당, 신진당, 자유당을 거쳐 2002년 민주당과 자유당을 합당하는 형식을 통해서 지금의 민주당에 뿌리를 내렸다. 자민당으로부터 정권 교체를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정치 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토록 염원하던 총리는 맡지 못했다. 하지만 집권 초기 간사장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정치 자금 문제가 커지면서 당내 세력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때를 기다렸다. 오자와의 의도대로 노다 총리는 궁지에 빠졌다. 중의원 과반 의석은 유지했지만 추가 탈당도 배제할 수 없다. 단독으로는 법안 통과가 어렵다. 소비세 인상 법안이 중의원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의 협력하에 통과되었다. 하지만 오자와의 탈당으로 참의원에서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협력이 아니라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자민당은 조기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소비세 인상이 집단 탈당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소비세를 인상하면 오자와가 이끄는 의원들이 집단 탈당할 것이라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노다 총리는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GDP(국내총생산)의 두 배 이상인 재정 적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국민들도 세금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오자와가 탈당해야 할 명분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는 강행했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한 지붕 다가족’ 체제로 출범한 것도 원인

자신의 계보 의원들과 집단 탈당한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전 대표. ⓒ AP 연합
민주당에는 3년 전 정권 교체를 위해 이념과 출신이 다른 다양한 세력이 뭉쳤다. 목표는 자민당 정치의 종식을 통한 정권 교체였다. 당내에는 마쓰바라 진 의원과 같이 종군위안부 동원에는 정부의 조직적 개입이 없었다고 강변하는 극우 성향의 의원에서부터 간 나오토 전 총리와 같은 시민운동가 출신들이 동거했다. 한 지붕 다가족 체제였다. 오자와 전 대표가 이끈 일신회, ‘정권 교체를 실현하는 모임’인 하토야마 그룹, 마쓰시다 정경숙 출신들과 언론계 모임인 노다 그룹, 현 간사장인 고시이시 노조 출신 등의 크고 작은 그룹이 아홉 개나 되었다.

선거를 승리로 이끈 오자와가 당·정 운영 및 간섭을 하는 것은 잦은 불협화음이 생긴 원인이었다. 오자와는 자신이 없었으면 오늘의 민주당도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모든 갈등의 원인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당·정의 정책 기조를 오자와가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민주당은 무리한 정책을 쏟아냈다. 소비세 인상 논의 중지, 증세 금지, 자녀수당 1인당 2만6천 엔(36만4천원) 지급, 고속도로 무료화 등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공약이었다. 이를 통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정권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공약의 허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적자 상태인 재정으로는 도저히 이행할 수 없었다. 공약을 수정하고 급기야는 폐기하기도 했다. 집권 기간 내에 소비세 인상을 논의하지 않겠다던 민주당은, 간 나오토 전 총리가 참의원 선거에서 인상 불가피를 주장하다 선거에서 대패했다. 증세 금지 약속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자 오자와가 반발하기 시작했다. 국민과의 약속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자와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맞다. 한편으로는 노다 총리를 비롯해 간 나오토 전 총리 그리고 자민당과 공명당까지 소비세 인상에 찬성하는 데는 현실적 타당성이 있다. 역으로 오자와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자와의 명분 속에는 정치적 야욕이 숨겨져 있다는 얘기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갈등의 근본 원인은 공약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갈등의 불씨를 3년 내내 끌고 온 셈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자와가 탈당함으로써 갈등의 소지가 줄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노다 정권은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이다. 정권 획득만을 위해 공약 선정에 신중하지 못했던 실수의 대가가 너무도 크다. 그 결과가 머지않아 있을 중의원 해산이다. 3년 내내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있다. 총리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오자와의 창당을 앞두고 정치권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어떤 경우에든 현 체제로 오래 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필요한 의원 수는 51명이다. 현재로서는 추가 탈당에 동조하는 현상이 없어 보이지만 하시모토 전 총리 세력이 잠재적인 변수이다. 각 정당은 중의원 해산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시기를 보고 있다. 회기가 끝나는 8월 말이나 9월 초가 예상 시기이다. 9월 말 민주당과 자민당 대표 선거 후 새 대표 체제에서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민주당과 노다 총리에게는 시련이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오자와의 탈당으로 출신 성향과 이념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민주당다운 민주당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좀 더 큰 틀에서 보면 보수와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이합집산할 수 있는 정계 재편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약으로 3년 내내 갈등을 경험한 정치권과 국민들은 색깔이 분명한 정당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소비세 인상 문제로 당이 분열되고 머지않아 국회가 해산되고 중의원 선거를 치르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소비세 문제는 차기 선거에서도 핫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오자와는 반(反)소비세를 선거 이슈로 기정사실화했다. 그 밖에도 2009년 당시 민주당의 매니페스트(정권 공약)를 실현하겠다는 공약을 다시 공약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합의되지 않는 정책 공약이 정권 운영과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다.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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