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향한 지극한 효심 편지에 담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7.23 21:3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조의 시문 태조가 정도전에게 준 작은 서찰 / ‘송헌거사’라는 호칭으로 방한용 동옷과 함께 보내

삼봉 정도전 선생 영정(三峯鄭道傳先生影幀) 이 영정은 1994년 10월 권오창 화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정도전 선생의 표준 영정이다(제54호). 현재 문헌사 사당 내에 봉안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6년인 1397년 12월22일 정도전을 동북면 도선무순찰사로 삼아 군·현의 경계를 정하게 하고 공주(孔州: 함경도 경흥)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경원부를 설치하게 했다. 이때 태조는 이왕실의 조상 능묘로서 함흥에 있는 덕릉과 안릉도 정비하도록 명했다. 덕릉은 태조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즉 목조의 능이고, 안릉은 고조모 이씨 즉 효공왕후의 능이다.

태조는 즉위한 후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하려는 정성에서 위쪽으로 4대를 모두 왕으로 추숭하고 능원의 침묘를 세우고 선영을 봉해 깨끗이 가다듬고 사철로 제사를 지냈다. 종묘나 능원의 앞 건물을 묘(廟), 뒤의 건물을 침(寢)이라고 한다. 묘에는 조상의 위패나 목주(신주)를 안치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침에는 선조의 의관과 궤장을 비치했다.

그런데 덕릉과 안릉은 공주에 있는 탓에 길이 멀어서 제사를 받들지 못했으므로 태조는 늘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래서 동북면의 행정 조직도 정비할 겸, 공주의 조상 묘역을 정비하도록 심복인 정도전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종사관 최긍(혹은 최신이라고도 함)을 보내어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게 했다. 그러자 태조는 중추원부사 신극공을 동북면 도선위사로 임명해서, 이듬해(1398년) 초, 정도전에게 작은 서찰과 함께 동옷 한 벌을 보냈다.

또 정도전의 부관으로 나가 있던 이지란과 이원경에게도 동옷 한 벌씩을 보내면서, 이 서찰에서 그 사실을 알렸다. 솜을 넣고 안팎으로 생무명을 받쳐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옷으로, 조선 시대의 겨울 군복이었다.

이성계의 서찰은 분명히 공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투식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보내는 편지 같다. 서찰 끝의 불구(不具)는, 말을 갖추어 전하지도 못하고 예를 갖추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서찰의 마지막에 적는 상투어이다. 여불비례(餘不備禮)나 불비(不備)라고도 한다. 또 서찰에는 왕의 도장을 눌러두었다고 하며, 겉면에는 ‘삼봉행차개탁(三峯行次開坼)’이라 적었다고 한다. “외지에 나가 있는 삼봉(정도전)은 열어보시오”라는 말이다.

1. 작별한 지 오래되어 몹시 생각이 나서 신 중추(중추원부사 신극공)를 보내어 그대의 행역(行役)을 위문하게 하려 했는데, 마침 최긍이 그쪽에서 돌아왔기에 그대의 근황을 갖추 알고 나니 조금 위로가 되는구려.

2. 이제 동옷 한 벌을 그대에게 보내어 바람과 이슬에 대비하도록 하니, 받아주시오.

3. 이 참찬(이지란)과 이 절제(이원경)에게도 유의를 한 벌씩 보내오.

4. 부디 그들에게도 그리워한다는 뜻을 전해주시오. 나머지 할 말은 신 중추 편에 하겠소.

5. 봄날의 추위가 이렇게 심하니, 몸을 보중해서 변방의 공을 잘 마치도록 하오.

6. 불구.

7. 홍무 31년 1398년·태조 7년 1월 일, 송헌거사 씀.

1) 서울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 는 역대 국왕의 저술을 모은 책이다. 일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서너 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맨 처음에는 인조 때 의창군 이광(李珖)이 사적으로 엮었으나 이후 그것에 이어 국가에서 각 국왕의 저술을 수집해서 편찬했다. 영조의 어제는 영조가 죽기 전에 영조 자신이 편찬 원칙을 마련해서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즉시 간행되었다. 고종 때 정원용 등이 왕명을 받들어 최종본을 교정해서 간행했다. 2) 제1권에 실려 있는 태조의 ‘사정도전서(賜鄭道傳書)’.

이성계의 이 서찰은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과 조선 시대 역대 군왕의 시문을 모아둔 <열성어제>에 실려 있다. <삼봉집>에는 1398년 정월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정월이 아니라 2월 중에 보낸 것이 분명하다. <태조실록>의 태조 7년 2월4일(신사) 기록에, 태조가 좌승지 이문화에게, “지난 왕조의 충숙왕이 거사라고 일컬으면서 예천군 권한공에게 글을 보낸 일이 있다고 들었다. 나도 봉화백에게 거사라고 자칭하면서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를 할까?” 묻자, 이문화가 “상감의 잠룡 때 헌호가 어떠합니까?”라고 해서, 태조가 마침내 송헌을 호로 했다고 되어 있다. 봉화백은 곧 정도전의 봉호이다.

이성계는 서찰의 끝에 송헌거사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는 고려 말에도 송헌이라는 별호를 사용했지만, 당시에 그것은 누헌의 이름이었으므로 스스로를 송헌거사라 한 것은 정도전에게 보낸 서찰에서가 처음이었다.

역사적 의의 가장 큰 국왕-신하 간 서찰

송헌이라는 헌호는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이 지어준 것이다. 이색은 이성계의 부탁으로 헌호를 송헌이라 지어주었다. 단, 함흥 지리지인 <풍패지>는 이성계의 행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송헌거사는 태조의 자호라고 했다.

태조가 등극하기 전에는 귀주동(歸州洞) 환조의 옛집에서 살았다. 그래서 뒤에 태조가 함흥에 옮겨가 살면서 본궁의 옛 유적지에 손수 소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송헌거사라고 자호했다. 지금도 그 소나무가 본궁의 뒤뜰에 있다. 이 소나무는 전란의 화도 당하지 않았고 새도 깃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천계(天啓: 명나라 희종의 연호) 4년(갑자·1624년) 이후로 세 그루는 저절로 말라 죽고 한 그루는 절반쯤 말랐으며, 두 그루만 예전과 같다.

천계 4년 이후에 소나무 세 그루가 말라 죽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그해에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를 떠나 함흥으로 들어왔던 일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 무렵부터 후금의 세력이 강해져서 조선을 침범할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부터 조상들의 묘를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그 무렵 다른 사대부들도 조상의 묘를 확인하고 비를 세우는 일에 큰 관심을 두었다. 이때 이성계는 우왕 14년(1388년) 겨울에 이색에게 청해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를 작성했고, 1389년 2월 을축의 날에 묘비를 세울 때 그 음기(빗돌 뒷면 기록)인 〈전주이씨이거삭방이래분묘기(全州李氏移居朔方以來墳墓記)〉를 다른 누군가에게 작성케 했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공민왕 4년(1355년) 고려에 귀부해, 이듬해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탈환했다. 고려에서 벼슬을 받고 개경에 머무르다가 1년 만에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에 임명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 간 지 4년 만에 병사했다. 조선 태종 때 환조로 추증되었다.

태조는 조상의 묘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하나의 선산에 이장하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상 묘의 위치를 기록해두고, 위로는 조종의 미덕을 전해 받고 아래로는 자손의 효심을 계발하려는 의도에서 조상의 묘역을 정비했다. 훗날 현종 15년(1674년) 남구만은 함흥 지방을 순력하고 <함흥십경도기(咸興十景圖記)>를 지어, 태조 위로 5대조 신위를 제사하던 함흥 본궁과 환조·태조의 신위 및 태조의 화상을 모신 영흥 본궁, 함흥의 덕릉·의릉·순릉·정릉과 안변의 지릉, 문천의 숙릉 등 여섯 능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동북면의 성과 보를 수축하고 거주민을 안정시키는 일, 고을의 경계를 구획해 분쟁을 막는 일, 군민의 호를 정해 등급을 정하는 일 등등 공적 업무를 맡겼다. 그러면서 이성계는 함경도에 있는 덕릉과 안릉을 보살피라는 사적 임무도 맡겼다. 그리고 서찰의 마지막에 ‘조상을 받들어 효도하려는 것은 자식의 정성’이라고 할 만큼 그 사적인 임무도 중시했다.

태조는 동북면 출신으로서 동북면의 안정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의 사적인 관심은 동북면을 조선의 강역 안에 확실하게 편입시켜 안정시킴으로써 우리나라의 강역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원이 되었다. 따라서 태조가 정도전에게 개인적인 형식으로 보낸 서찰은 조선 역사에서 국왕이 신하에게 보낸 서찰 가운데 가장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시문>, 책문, 2012.

<시사저널 주요 기사>

▶ 아이젠하워와 루스벨트, 그리고 안철수의 길

▶ 북한의 ‘젊은 김일성’, 새로운 길 찾나

▶ “북한 사람들, 미국 침공 걱정 안 해”

▶ ‘스타리그’, 마지막 불꽃 태우다

▶ 외교·경제 갈등 범람하는 메콩 강

▶ ‘안철수 현상’의 진실을 아직 모르는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