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고엽제 40년 만의 ‘대청소’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8.26 22: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베트남에서 오염 지역 정화 작업 착수 현지 피해자의 치료·보상과는 무관해 ‘눈총’

지난해 6월17일 베트남 다낭 공항 근처에서 베트남인들이 고엽제 청소를 실시하고 있다. ⓒ AP 연합

열대 우림인 중부 베트남에는 도처에 잡초가 무성하다. 그러나 단 한 곳, 다낭에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이곳에 가장 많은 고엽제가 살포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기간 중 베트콩과 월맹군의 은신처로 사용되는 정글에 제초제인 고엽제(Agent Orange 또는 Defoliant)를 살포했다. 고엽제에 함유된 다이옥신은 발암, 기형아 출산, 신경계 마비 등을 일으키는 맹독 물질이다. 고엽제가 뿌려진 지역은 대략 24곳이나 다낭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중부 베트남에 가장 많이 살포되었다. 살포 지역은 고농도의 다이옥신 성분으로 오염되어 있다.

잔류 고엽제를 제거해달라는 베트남의 요구를 수년째 거부하던 미국은 지난 8월9일 마침내 고엽제로 인한 환경 피해를 처리하기 위한 작업에 처음으로 착수했다. 40년 만이다. 데이비드 시어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는 베트남군 고위 장교들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미국은 고엽제를 청소할 것이라면서 “오늘 아침 우리는 상호 관계에 새 이정표를 쌓는 작업을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너무 늦었고 형식적이다” 비난받아

미국은 4천3백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4년에 걸쳐 고엽제 찌꺼기를 깨끗이 청소할 계획이다. 양국 관리들은 이날 악수를 교환하면서 전쟁의 슬픈 유산을 청소하는 작업을 축하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악수와 미소만으로 고엽제의 후유증을 달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고엽제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피해자들은 아직도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나마 시작된 작업은 잔류 고엽제를 제거할 뿐 피해자의 치료나 보상과는 무관하다. 

8월10일은 고엽제가 처음으로 베트남에 살포된 날이다. 이날 베트남 각지에서는 기념식을 열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다. 베트남 정부는 올해 런던올림픽에 후원금을 내겠다는 다우 케미컬의 제의에 거부 입장을 밝혔다. 다우 케미컬은 베트남전쟁 기간 중 베트남에 고엽제를 가장 많이 납품한 미국 기업이다. 다우 케미컬의 후원 제의에 대해 많은 사람은 너무 미미하고, 늦은 조치라고 비난했다. 워싱턴 주재 베트남 대사를 지냈던 고 쾅 수안은 “미국으로서는 용단을 내렸을지 모르나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충분치 않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후반기 10년간 약 2천만 갤런의 고엽제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뿌렸다. 고엽제 살포 작전은 미국 농무성이 이 제초제가 기형아 출산을 초래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발표한 후에야 중단되었다. 살포가 중단되기 이전까지 고엽제 피해를 입은 산림과 농토의 총 면적은 2백만㏊로 미국 뉴저지 주의 면적과 비슷하다. 피해 지역은 곡식은 물론 풀도 자라지 않는 폐허로 변했다. 

현재 고엽제피해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전 베트남군 중장 구엔 반 린에 의하면 미국 비행기들은 베트남 중부 고원 지대에 마치 소나기를 퍼붓듯 고엽제를 뿌렸다. 고엽제에 노출된 식물과 동물들은 수일 내에 사망했다. 살포 작전에 참가한 군인들도 정상적인 농업용 살포 때보다 20 내지 55배 더 노출되는 바람에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린 장군은 미국이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피해자들을 치유한다면 양국 관계가 한층 격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고엽제 청소 작업을 시작하면서도 많은 욕을 먹고 있다. 그런 노력이 너무 늦었고, 게다가 형식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이 이 문제에서 꾸물거린 것은 돈 때문이다. 고엽제와 관련한 책임을 인정할 경우 그에 따른 천문학적 액수의 보상 청구가 겁이 났다는 것이다. 미국은 고엽제 작전에 참가한 군인과 제초제 생산 회사 간의 분쟁을 타결하는 데도 수년이 걸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국 정부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는 미국인 고엽제 피해자를 치료하고 보상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면서 정작 베트남인들의 피해는 외면했다. 이날 식에 참석한 시어 대사는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고엽제 관련 책임을 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즉답을 피했다.

베트남 고엽제 프로그램의 찰스 베일리 국장은 미국 정부가 고엽제 피해 처리에서 베트남인과 미국인을 차별했다고 지적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비정부 기구 아스펜 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다. 고엽제로 피해를 입은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을 대리해 미국에서 2005년에 제기된 집단 소송은 기각되었다. 이유는 고엽제를 제공한 행위가 전쟁 행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베트남인들이 고엽제로 인한 피해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후유증 치료 비용으로 1천1백40만 달러를 책정했으나, 토지 복구를 위한 원조일 뿐 고엽제에 관련된 후유증 피해에 대해서는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미국은 또한 고엽제 복구비의 성격을 밝히지 않은 채 ‘원조’라는 모호한 용어로 고엽제 문제를 호도했다.

고엽제 둘러싼 양국의 의견 대립도 여전

베트남 수도 하노이 인근 마을에 사는 고엽제 피해 어린이들. ⓒ EPA 연합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고엽제로 인한 질병이 발생했을 경우 이것이 환경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구체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며 채증 의무를 베트남에 떠넘긴 미국의 조치를 비판했다. 미군  당국은 고엽제와 그것에 관련된 질병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인정했으나 다우 케미컬은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 질병을 앓는 미군 병사들이 고엽제로 인해 발병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에서는 많은 사람이 고엽제 관련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전쟁에 5만명의 장병을 파견한 한국에서도 2만5천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고엽제 때문에 미국과 베트남은 극단적 의견 대립을 하고 있다. 베트남은 토양에 스며든 고엽제가 물고기나 조류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면 온갖 질병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베트남에서는 15만명의 어린이들이 조류를 통한 감염으로 기형 장애를 앓고 있다. 많은 베트남 여인은 유산을 했으며 기형 인자는 3세대에 걸쳐 유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고엽제 피해 보상을 미루다가 중국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기 위한 베트남 포섭 작업의 일환으로 일부 보상을 했다. 미국의 정책 변화는 6년 전 부시가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1996년 다낭으로 이주해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던 한 베트남 가족은 그들이 잡은 생선에서 고농도의 다이옥신이 검출되는 바람에 어업을 포기했다. 또한 다낭에서 태어난 딸은 7세에 희귀한 혈액병에 걸려 사망했다. 2008년에 출생한 아들은 의사로부터 세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고 세 살이 지나도록 생존했으나 눈이 멀고 목소리가 변성되는 후유증을 얻었다. 모두 고엽제가 살포된 후에 일어난 일이다. 월 소득이 3백50달러인 이 가정은 수입의 절반을 치료비에 쓴다. 

기형아가 태어나고 물고기가 변형되는 사태가 일어나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책임을 질지는 미결로 남아 있다. 그저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미군이 고엽제를 살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푸념만 들릴 뿐이다. 전쟁은 끝났으나 고엽제로 인한 신음은 여전하다. 그리고 고엽제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은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뻔뻔하고 무책임하다. 막말로 모든 것은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다낭 주민들은 기왕에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낭 공항 주변만은 고엽제 청소를 해야 다음 세대의 희생자를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시사저널 인기 기사]

▶ 안철수 ‘독자 정치’의 꿈

▶ ‘MB 임기 내 완공’ 서두른 곳 또 있다

법정 다툼 잘 날 없는 ‘박근혜 동생’들

'환자 밥값’까지 빼돌려 병원 ‘뒷돈’ 챙겼나

삼성-CJ, 방송법 개정안 놓고 왜 티격태격?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