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육상잔의 통렬한 아픔 담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09.10 16: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종의 시문 ④ / 회안대군 이방간에게 ‘생명 유지시켜주겠다’며 보낸 편지

전북 전주에 위치한 회안대군 이방간의 9 묘. ⓒ 최낙기 풍수지리연구소 제공
태종은 즉위 2년(1402년, 임오년) 12월2일(신해년), 형 이방간(1364~1421)에게 안전을 약속하겠다는 뜻을 담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태종이 남긴 한문 산문이라고는, 골육상잔의 통렬한 아픔이 배어 있는 이 글밖에 없다. <태종실록> 권4에 실려 있고 <열성어제>에도 실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백형 부자가 순천으로 옮기던 날에 말을 달려 도피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라고 했는데, 내가 경진년(1400년)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형을 보전하려고 하는 마음이 날로 두터웠소. 근일에 김여생과 중 묘봉 등이 거짓으로 백형이 난을 꾸몄다고 일컬었으므로, 이미 조사해서 반좌율에 처했소. 또 근자에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군사를 움직이자 백관이 대궐에 나와 백형을 제주로 내치자고 청했지만, 내가 제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너무 멀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소. 부디 백형은 의혹을 품지 마오.

당시 동북면 함주 등지에 가별치(加別赤)라는 일당이 서로 결탁해 호기를 부리다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강씨)의 친척인 조사의 등과 결탁했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그들이 이방간을 지지하지 않을까 우려해 제주도로 안치하자고 청한 것이다. 당시 서산에 유배되어 있던 이방간은 수렵을 하는 등,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태종은 그를 순천부로 이배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나졸들이 오자 이방간은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은 아닐까 염려해서 말을 달려 도망하려고 했다. 그러자 태종은 전농정(典農正) 박실을 순천으로 보내 위의 편지를 이방간에게 주어, 형의 생명을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한씨와 강씨 두 부인이 있었다. 한씨는 신의왕후에 봉해졌는데, 여섯 아들을 낳았다.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맏이 방우는 진안군에 봉해졌으나, 일찍 죽었다. 셋째 방의는 익안대군이다. 넷째가 방간으로 회안대군에 봉해졌다. 여섯째는 방연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경신궁주, 다음은 경선공주이다.

방간, 익주·서산 등으로 떠돌이 유배

이방간의 인간됨에 관해서는 기록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야심을 품고 있어서 동생 이방원을 질시한 듯하다.

재1차 왕자의 난의 결과로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는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의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가 정종이다. 그러나 정종은 격구에 탐닉할 뿐, 국정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아우 익안대군 이방의도 야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 회안대군 방간은 적장자가 없는 정종의 뒤를 잇기 위해 세제가 되려고 생각했다. 야심은 아들 이맹종과 지중추원사 박포의 충동질로 커져갔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왔지만 논공행상에서 2등으로 떨어지고 잠시 유배 생활도 해야 했기에 불만을 지녔던 인물이다. 정종 2년(1400년), 이방간은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을 공격했다. 정종이 이문화를 보내 달랬으나, 양측은 개경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싸움에서 패한 이방간은 서동으로 도주하다가 붙잡혀 토산현에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되었다.

토산은 전에 이방간이 군사를 분령한 곳이었으므로, 정종은 후일의 염려가 있다 해 그를 안산으로 이치하게 했다. 이때까지 이방간은 전지와 식읍을 받았으며 해마다 원일에는 입경을 허락받았다. 이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이방원은 다음 달에 세제가 되었다. 2개월 후 9월에 임금 자리에 오른 이방원은 이방간을 익주로 옮겼다가 다시 서산으로 옮기고 또 순천부로 옮겼다. 한곳에 자리 잡아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그렇게 한 것이다.

태종은 즉위 4년인 1404년 5월9일(기유)에는 사간원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방간을 순천에서 익주로 옮겨 안치했다. 당시 사간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제 뜻을 얻지 못하면 원망하는 것이니, 방간이 감사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귀양 간 것을 원망할지 어찌 알며, 또 분함과 원한을 이기지 못해 도리어 변을 일으킬 마음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게다가 순천부는 바닷가에 접해 왜구가 침노하기 쉬운 곳인데, 만일 이방간이 왜구와 더불어 한 무리가 되어서 그 뜻을 행하려고 하면, 반드시 국가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이방간이 왜구와 한 무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사간원이 우려할 정도였으니, 이방간의 분노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사간원의 상소 이후에 태종은 이방간을 이전에 있던 익주로 옮기게 했다. 즉위 7년(1407년)에는 그를 완산으로 옮겼다. 태종은 완산부윤에게 전지를 내려, 이방간이 가까운 지역에서 천렵하는 것을 허용하게 하고 관가의 작은 말을 내주어 타고 다니게 하도록 시켰다. 즉위 14년(1414년)에는 이양우라는 자가 이방간과 사통했으므로 전라도 관찰사가 엄하게 감시했으나, 4월28일(신미)에 태종은 전라도관찰사에게 전지해 감시를 풀라고 했다. 즉위 16년(1416년) 9월에 이방간의 딸이 혼인하게 되자, 태종은 전라도관찰사를 시켜서 혼수를 주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 해에 형조와 대간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청하자, 태종은 이방간 부자의 공신 녹권과 직첩을 몰수하고, 다음 해 그를 홍주로 이치했다. 세종 때인 1419년에는 노비 100구를 내놓아야 했지만, 이방간은 천명을 누리다가 홍주에서 죽었다. 단, 아들 이맹종은 세종 때 처형되었다.

태종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친형을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끝내 죄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조선 왕조의 제3대 왕인 태종의 재위 1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 ⓒ 연합뉴스
숙종 때에야 <선원록>에 ‘신설’ 돼

이방간의 후손들은 대대로 서산에 거주했는데, 종실 취급을 받지 못하고 천역에 배정되었다. 선조 40년(1607년)에는 종실 족보인 <선원록>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는데, 선원록 교정청은 <실록>에 이방간을 신설(伸雪)한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선원록>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려고 했다. 선조는 “당시에 지은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지만 백세의 후손을 어찌 영원히 끊을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모두 용서해 <선원록>에 기록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다고 여긴다”라고 했다. 예관이 대신에게 의논해 기록하도록 허락해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때 이방간은 신설되지 못했다. 숙종 6년(1680년) <선원록> 이정청의 계품에 따라 그 자손과 함께 이방간은 <선원록>에 이름이 실렸으며 신설되었다.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흔히 근대 이전에는 형제간의 우애가 지금보다 친밀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민간의 서민들 사이에는 형제간 송사가 적지 않았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형제끼리 송사하는 일이 없도록 교화하라고 당부했다. 그보다 앞서 송강 정철(1536~1593)이 1589년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백성들을 교화하려고 지은 <훈민가> 연작에 이런 시조가 있다.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라.

누구에게서 태어났기에

모습조차 같은 것인가?

같은 젖을 먹고 자라났으니

딴 마음을 먹지 마라.

정철은 단시조에서도

형제간 송사를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강원도 백성들아 형제 송사 하지 마라

종 밭 는 얻기에 쉽거니와

어디 가 또 얻을 것이라

흘낏흘낏 하난다


근대 이전의 사대부들이나 종실들도 탐욕에 몸을 내맡기고 형제를 상대로 극렬하게 다툰 예들이 적지 않다. 태종이 유배된 형 이방간에게 부친 서찰은 왕실의 치욕을 감추고 있다. 후대 왕들은 그 치욕을 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방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시사저널 주요 기사>

우리 주변에 아동 성범죄자 얼마나 있나

김효석 전 민주당 의원이 말하는 '안철수 생각'

MB, 20억 대출받아 사저 신축 중

[표창원 교수의 사건 추적] 악마가 된 외톨이 빗나간 분노의 돌진

교통사고 뒤에 숨은 공산당 최대 스캔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